이기용 인천지방법무사회 정보화위원
이기용 인천지방법무사회 정보화위원

"왜 또 소송했어요? B에 대한 소송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다음 기일까지 법적 근거를 대지 못할 거면 취하하세요." 해를 넘겨 5개월 만에 다시 만난 판사님은 이 한마디로 변론기일 일정을 모두 마쳤다. 이번에도 공시송달. 피고는 역시 출석하지 않았다. 김 사장은 같은 판사님을 다시 만난 놀람이 컸지만, 그나마 이번에는 다음 기일을 잡아준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김 사장이 대표인 을(주)< 이하 (주)는 주식회사를 말함>은 건설 관련 용품 유통업을 하다가 최근 건설업도 시작했다. 선배 소개로 창고 하도급 공사를 했다가 1억5천만 원의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 발주자인 A와 B 부부는 ○○시에 창고건물과 그 부지를 ½씩 공유하며 그 자리에 ‘○○창고’라는 상호로 공동사업자 등록을 하고 창고업을 했다. 

A는 ‘○○창고 대표 A’로 업무 집행 활동을 해온 바, 창고건물 증축공사를 갑(주)에 도급을 줬고, 갑(주)은 공사 일부를 을(주)에 하도급 줬다. 위 3자 간에 하도급 공사대금을 ○○창고가 을(주)에게 직접 주도록 직불합의서가 작성됐다. A는 직불합의서에 ‘○○창고 대표 A’라고 쓰고 날인했다. 김 사장은 나에게 공사 대금청구 소장 작성을 의뢰했고, 나는 A와 B가 연대해 공사대금 전액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소장을 작성해 드렸다. 왜냐하면 ○○창고는 A와 B를 조합원으로 하는 민법상 조합이며, A가 조합의 업무 집행으로 창고의 증축공사와 관련해 직불 합의를 하고 부담하게 된 하도급 공사 대금채무는 조합원 전원을 위한 상행위로 부담하게 된 조합 채무이므로 B도 연대해 공사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판사님은 김 사장에게 "B는 서류에 도장을 안 찍었으니 B에게는 소송할 수 없는 거예요. A에게만 소송하는 걸로 하고 B에 대한 소송은 취하하는 걸로 하세요. 아셨죠?"라고 했고, 김 사장은 놀라 "예?" 하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럼 취하하는 걸로 하고 승소 판결을 해 줄게요." 판사님은 변론을 종결하고 선고기일을 정한 후 곧 다른 사건의 심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달 말 A에 대한 승소 판결문을 받았으나, 미리 가압류해 둔 공유부동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위해서도 B에 대한 청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의 조언에 따라 김 사장은 다시 B에 대해 공사대금 전액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기로 했다. 두 번째 소장은 첫 번째 소장에서 A에 대한 호칭만 적절히 수정한 것이었다. 소장 접수 4개월 만에 잡힌 첫 기일에서 김 사장은 5개월 전 그 판사님을 다시 만나 놀란 것이었다. 나는 준비서면에 B가 공사대금에 대한 채무를 지는 이유에 대한 이론 및 판례를 소장보다 더 자세히 기재했다. 그리고 추가해 이 모든 내용이 부정된다고 하더라고 B는 명의 대여자로서 A와 연대책임을 지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기일에 판사님은 김 사장에게 아무 말 없이 승소 판결을 해주겠다고 했고, 후에 받아 본 판결문의 판결 이유는 내가 작성한 소장의 청구 이유를 그대로 스캔해서 넣은 것이었다. B에 대한 청구가 취하되고 6개월 만이었다. 

판사님은 두 번째 판결문을 작성하시며 김 사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김 사장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청구가 취하되고 6개월 후 같은 판사님으로부터 처음 원했던 판결을 받아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리해야 할 수많은 사건 때문에 법원의 재판이 마치 종합병원 진료처럼 오랜 기다림 후에 불과 몇 분만의 절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에 너무도 짧은 그 시간은 일반인들에게 평생 몇 번밖에 없을 낯설고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예?"가 "예."로 받아들여져 다시 소송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재판 받을 권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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