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근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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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근 할매
정상미 인천문인협회 회원/시인
  • 기호일보
  • 승인 2020.01.21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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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미 인천문인협회 회원
정상미 인천문인협회 회원

딸아이의 얼굴에서 할머니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짙은 눈썹과 가무잡잡한 피부, 동그스름한 얼굴이 영판 할머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나는 미국에 있었다. 남편은 가난한 유학생이었고 큰아이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내 처지를 알아서인지 엄마는 할머니의 부음을 알리지 않았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신행 차 갔을 때다. "상미라? 양 서방인가?" 

눈을 감으신 채로 더듬더듬 내 손과 얼굴을 만지던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더니 어깨도 쓰다듬었다. 그때 팔순을 코앞에 둔 할머니는 불행히도 녹내장이 악화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목이 메었다. 우리는 할머니를 ‘짜근 할매’라고 불렀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다. 아이가 없었던 큰할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별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십일 년 동안 혼자였던 할머니, 긴 세월 독수공방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결혼을 하고 철이 들면서 헤아려졌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작은 할머니를 그냥 ‘할매’라고 불렀다. 할머니와 외며느리인 엄마 사이가 늘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주인 우리에게는 끔찍했다. 잔칫집에라도 다녀오시면 꼭 떡이며 과자를 따로 싸서 가져와 나눠주시곤 했다. 우리는 할머니께서 풀어놓을 보따리가 좋아서 출타하신 할머니를 은근히 기다리곤 했다.  할머니는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담요 같았다. 엄마에게 꾸중을 듣거나 언니 오빠와 싸워 풀이 죽어있을 때 나를 안아서 다독거려 주셨고 배가 아플 때는 ‘할미 손이 약손! 할미 손이 약손!’ 하시며 배를 밀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배가 아프지 않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치마폭을 들추시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복주머니에서 알사탕과 동전이 나왔다. 나는 특별히 그 복주머니에 꼭꼭 접어 넣어둔 지폐를 얻어 쓰기도 했다. 할머니께서 구워주셨던 자반고등어와 맛있게 무쳐주셨던 무생채의 기억도 새삼스레 떠올랐다. 여고 시절 대구 상동에서 자취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쌀쌀한 늦가을, 학교에서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와 계셨다. 밥을 해 주러 오셨다고 하는데 나는 반갑기도 했지만 "혹시 엄마와 불화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안색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대구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할머니는 TV도 없이 라디오만 있던 자취 집에서 지내시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빈방이었다. 찬바람만 휑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주 살갑게 말을 붙이지도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할머니가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별다른 증상 없이 진행돼 치료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집안 형편도 형편이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할머니는 시집오시기 전부터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할머니의 친가가 있고 그 가족이 종종 할머니를 찾아오기도 하던 것을 기억하는데 무슨 이유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것인지 무척 안타까웠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팔방으로 애를 써 보셨지만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는 호적이 없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셨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다. 무적(無籍)이라니! 그동안 할머니가 겪으셨을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집에 갈 때마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 손을 잡고 얘기도 많이 하며 답답하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왜 안 답답해, 답답하지." 

밥상의 반찬을 더듬거리며 손으로 만져보고 더러는 손가락으로 집어서 드셨던 할머니, 나에게 할머니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덩어리이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중 산을 오른다. 풀쩍 뛰어 달아나는 풀무치의 색깔이 누런색이다. 콩밭의 콩깍지들도 누렇게 변해가고 사과밭에는 사과가 붉다. 이맘때는 저 풀 섶에 숨은 뱀들도 통통해져 있을 것이다. 벌초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산소는 잘 정리돼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나란히 누워계신다. 할머니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비석을 본다. 돌아가신 뒤에야 가장 편안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무적(無籍)의 짐을 내려놓았다.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흰나비 한 마리가 내 주위에서 나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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