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톨레랑스’를 가르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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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톨레랑스’를 가르쳐야 하는가?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 기호일보
  • 승인 2020.01.28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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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우리 사회가 온통 갈등으로 인해 아수라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영역 하나 안정돼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곳은 없다. 모두가 기득권 지키기와 집단 이기주의로 팽배해 있다. 나와 우리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향한 적대감과 혐오로 모두가 공멸을 자초하고 있다. 지난 한 해도 정치는 혼란을 부추겼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경제는 후퇴했고 외교안보는 설자리가 없으며 교육은 방향을 잃었다. 그러니 국민 간의 갈등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갈등 관리가 잘 되지 않으니 사회 발전의 촉매는 사라졌다. 혹시나 하던 국가의 위기마다 국민과 국가의 편에 서서 쓴소리로 올바른 길을 제시하던 원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국가가 굴러간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새로운 시대엔 국가회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은 국민통합이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해 나가는 추동력. 즉 톨레랑스가 필요하다. 톨레랑스는 곧 관용의 정신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톨레랑스는 인간은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이성적 인식에 기초해 출발했다. 자신의 종교, 사상과 다른 것들을 용인했다. 

톨레랑스 정신은 프랑스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공존의 대원칙이다. 이는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 사상, 신념 등을 용인함으로써 공존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덕목이다. 다민족, 다인종으로 구성된 프랑스가 중세 종교전쟁 시기에 가톨릭과 신교 갈등,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귀족·성직자 대 제3계급 간 갈등을 거치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데 대한 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에 못지않은 갈등의 파도를 넘고 있다.

필자는 평소 용서를 통한 관용 정신이 최고의 교육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35년의 교직 경험을 통해 이는 더욱 공고해져 간다. 과거의 단적인 한 사례를 들어 본다. 어느 날 군복을 입은 졸업생이 교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수업 중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빼앗겼던 적이 있던 제자였다. 당시 그는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하다 무엇이 두려웠는지 가방을 싸서는 교실을 나가버렸다. 필자는 당황했고, 교사의 권위와 자존심을 무너뜨렸던 그는 돌아오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라져 버렸다. 참았다. 그런데 이틀 후에 조용히 찾아와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노라 용서를 빌었다. 필자는 두 손을 꼭 잡아주면서 깨끗하게 용서하고 마무리했다. 그런 그가 첫 휴가를 나와서 필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한순간의 용서에 그는 가슴속에 깊이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았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인간사회의 운명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실수를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지금의 모습이다, 톨레랑스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같은 색깔만을 요구한다. 나와 다르면 곧 이단이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지나친 민족주의, 사회적 집단주의도 이런 맥락이다. 다원화돼 가는 우리 사회, 외국인 거주자가 200만이 넘어섰다. 다문화 가정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학교, 직장, 사회 어디서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공존의 정신과 관용인 톨레랑스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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