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사고로 두 눈을 잃은 사람이 집에만 있다가 어느 날 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햇볕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이웃 사람이 목적지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동정을 받기가 싫어서 혼자 걸었습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니 자신이 도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신호등이 있을 텐데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와 함께 길을 걸어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는 그의 팔을 가볍게 잡고 천천히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 건넜다는 생각이 들 때,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댔습니다. 신호가 바뀌었나 봅니다. 이렇게 주위에서 경적이 시끄럽게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게 도와준 이 남자가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두 사람이 드디어 도로를 다 건넜습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잡고 함께 길을 건너온 그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할 때, 그 남자가 먼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요?

"저 같은 시각장애인을 도와 길을 건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 두 사람 모두 시각장애인이었던 겁니다. 두 사람 모두 어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도로를 안전하게 건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해 무사히 건넜습니다.

이 예화는 조명연, 정병덕 두 신부님이 쓴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이란 책에 소개된 글입니다.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함께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려면 상대를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그 상대가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거나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손길은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저는 39살이 돼서야 미국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했습니다. 2년 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동장이 돼 제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선배님, 저희 동에 영어교실을 개설했는데 무료로 수업을 해주실 수 있나요?"

선뜻 승낙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영어교실이 벌써 24주년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또는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들로부터 받는 위로와 격려에서 힘을 얻고, 그들에게서 삶의 지혜인 겸손함과 친절함을 제가 오히려 배우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식구가 됐습니다. 안 보면 보고 싶은 식구 말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란 것을요. 아무런 목적 없이 사랑을 ‘내어줄’ 때 비로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지혜를 배운 것이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2주 전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매월 만 원씩 걷어, 강의실에서 커피나 간단한 다과를 드시곤 했는데, 그 돈을 아껴 동사무소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전했습니다. 장소를 무료로 제공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사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영어교실에 변함없이 오시는 어르신들이 선뜻 내민 사랑의 손길은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희망의 언덕으로 이끌어줄 겁니다. 

가야 하는 길에 이런 어르신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이제 저도 힘겨워하는 누군가에게 "함께 길을 걸어도 될까요?"라고 물으며 어르신들의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어르신들, 새해에는 더더욱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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