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경자년 설날 아침, 매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하지만 역시 올해도 어김없이 떡국 한 그릇과 전(煎)을 비롯한 몇 가지 음식을 더하여 설날 아침을 보냈다.

오랜 관습 탓인지 설 떡국을 한 그릇 먹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살 또 먹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어려서 즐겨 불렀던 동요를 마음속으로 불러보며 잠깐 추억 속에 잠겨보기도 했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던 옛날 그 시절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은 아이들에게는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던 것 같다. 

그 날만큼은 새로 마련한 예쁜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온 식구가 직접 준비한 설 차례 음식상 주위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받는 세뱃돈은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퇴색되는 모습이 완연하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고향 대신 연휴를 이용하여 국내외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근래에는 부모가 오히려 객지의 자녀 집을 찾아오는 역귀성(逆歸省)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설은 ‘전통문화’를 지켜나간다는 의미와 ‘가족들의 만남’의 계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명절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은 경자년(庚子年) 쥐띠해를 풍요와 희망, 기회가 오는 해라고 의미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해의 첫날이 좋아야 일 년 내내 복이 들어오고 만사형통(萬事亨通)한다고 하였으니 이번 정월에는 벽사초복(僻邪招福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부르다)의 자세로 새해에 대한 각오를 다져 보는 것이 어떨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장애를 뛰어넘어 장애인은 물론이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작가로서도 좋은 글을 남기기도 한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0)의 수필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이 있다.

매사 의욕이 떨어지거나 마음이 헛헛할 때마다 찾아 읽으면 보약을 먹은 것처럼 묘하게도 기운을 솟게 하는 글이다. 

작가는 글에서 첫날에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보고, 친구들과 아기, 강아지들, 책, 그리고 대자연의 찬란한 모습과 빛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둘째 날에는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모습을 보고,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과거와 현재의 흔적을 찾아본 후, 저녁에는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즐길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세상을 직접 겪어보기 위해 도시 한복판을 거닐어 보고, 가장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풍경도 내려다보고, 도시 길, 공장, 빈민가, 공원에도 갈 것이라고 적었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어디를 가장 가고 싶어 했을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형제들과 친구들이 가장 먼저 보고 싶겠지. 음악회나 예술작품 전시회에도 가고 싶고, 고향의 뒷동산과 바닷가, 친구들과 뛰놀던 옛 초등학교 운동장도 가보고 싶었을 게다. ‘내 앞에 많은 날이 남아있다는 생각에 삶을 당연하게 여기고 삶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깨닫지 못한 채 사소한 일에 매달린다’는 그의 지적은 늘 나를 책망(責望)하고 부끄럽게 한다. 

풍요와 희망, 기회가 오는 해라고 하는 올해에는 모든 이들이 갈등하기보다는 서로 소통하고 화목해져서 무슨 일이든 잘 풀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북 미간 대화도 잘 이루어지고, 무엇보다 남북 간 긴장이 줄어들어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나라가 얼마나 시끄러울까?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늘 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될 우리는 또 얼마나 좌절하고 실망하게 될까? 자기주장만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 정말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좋은 사람들이 선택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라 경제도 잘 좀 풀리고, 어려운 살림살이도 좀 나아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천정부지(天井不知) 집값도 안정되어 누구나 집 한 채 마련하는 좋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이 희망하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잘못된 제도나 시설, 환경 때문에 고통을 겪거나 귀한 생명을 잃는 일들이 올해에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나를 비롯한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가 어느 성직자의 말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며,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의 삶이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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