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로 시작하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 새’는 오늘 소개하는 영화 ‘이브의 세 얼굴’을 잘 요약한 한 줄 평 같다. 이 영화는 다중인격장애로 널리 알려진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다룬 작품이다.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신기하면서도 기괴한 다중인격 현상은 실제 사례가 학계에 보고되기 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소설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의학박사인 지킬은 약물을 통해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선과 악을 나누는 데 성공해 낮에는 학식 있고 점잖은 지킬 박사로 살아가고, 밤에는 약물을 통해 악의 화신인 하이드로 변해 온갖 폭력을 분출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실제와는 다르다. 다중인격은 약물을 통한 인위적인 정체성 분리가 아니며, 대체로 2개 이상의 다양한 자아가 나타난다고 한다. 영화 ‘이브의 세 얼굴’은 세 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로, 이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1957년도 작품이다.  

다섯 살 딸을 둔 이브는 평소 얌전하고 다소곳한 사람이란 인상을 주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몇 번의 짧은 기억상실을 경험한다. 정신을 차린 뒤 주변을 살펴보면 평소에는 입지 않은 과감한 스타일의 값비싼 드레스를 구매했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 모진 엄마가 돼 있곤 했다. 결국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간 이브 화이트는 자신의 내면에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이브 블랙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자신을 미혼이라 소개한 블랙은 화이트와 결혼한 남성이 못마땅했으며 5살 난 딸아이도 부정했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쾌활한 성향의 블랙은 가정주부 화이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최면을 통해 블랙과 화이트를 적절히 끌어내 치료하던 중 새로운 자아인 제인과도 마주하게 된다. 지적이고 품위 있는 제인의 존재는 어느새 이브 화이트와 블랙의 존재를 압도해 나간다. 그러나 통제가 어려운 서로 다른 세 자아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브 화이트, 이브 블랙, 제인 중 누가 삶의 주도권을 잡게 될까? 

영화 ‘이브의 세 얼굴’은 정신과 의사인 코베트와 허비 박사의 연구 사례를 각색한 작품이다. 놀라운 사실은 실제 여성은 3개가 아닌 22개의 자아가 있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종, 성별, 나이, 국적이 다른 다양한 자아가 서로의 의식을 공유하지 않을 때도 있어서 하나의 자아가 살인을 저질러도 다른 자아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고 한다. 때문에 픽션에서 다중인격장애는 범죄 미스터리의 단골 소재로 쓰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현상과 치료에 초점을 두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희귀질환인 다중인격장애는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아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경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본인이 아닌 다른 자아를 생성해 해당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 믿으며 자신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충격의 실체를 찾아 갈등을 해소하면 치료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속 이브의 경우도 트라우마를 통해 여러 인격이 생겨났음을 알게 된다. 공포물이 아닌 차분한 심리치료극에 가까운 이 영화는 다중인격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연기한 조앤 우드워드 덕에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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