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순 인천문인협회 이사
김을순 인천문인협회 이사

2002년 9월 13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 북쪽으로 가던 날이었다. 그 당시는 북쪽에서 찾으면 남쪽 가족이 5명 갈 수 있고 북쪽은 1명만 나오게 돼 있었다. 내가 어릴 때 헤어진 큰오빠가 북에 살고 있었다. 오빠는 의용군 신분으로 북쪽에 있는 송악산에서 근무했다. 어느 날 원산에 사는 이모 집에 찾아와서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으니 어서 남쪽으로 가세요"라는 말을 했다. 이모가 "너는 어쩌려고?" 묻자, 오빠는 "저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하고는 힁허케 나가버렸다고 남쪽으로 오신 이모가 말씀하셨다. 결국 전쟁은 터지고 오빠는 북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오빠에게서 오십 년 만에 연락이 왔다. 약속한 날 설봉호를 타러 고성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휴게실에 모여 대한적십자사 직원으로부터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내용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하지 말고 손으로 목표물을 가리킬 때도 손바닥을 펴고 엄지만 접고 목표물을 지적하라고 했다. 

설봉호가 부두에 정박한 후 이산가족들은 버스로 옮겨 탔다. 만남의 장소인 온정각으로 가는 길 양옆엔 철조망이 쳐있고 밖으로 펼쳐진 산에는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들에는 볏논도 있고 논두렁에 콩들도 보였다. 도착지에 가서 잠시 기다렸다. 평양에서 온 사람들은 남색 양복에 밤색 중절모를 쓰고, 함흥에서 온 사람들은 재색 양복에 재색 모자를 쓴 노신사들이었다. 그 중에서 남색 옷을 입은 노신사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김성한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다. 남쪽의 두 오빠는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다고 손을 잡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언니와 나는 어릴 때 헤어진 터라 김성한이라는 이름만 기억에 남아 있다. 언니와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우리가 지정석에 앉으니 오빠들도 따라 앉았다. 

언니에게 북에서 온 오빠의 첫마디는 ‘‘네가 양순이구나!" 였다. 나에게는 "너도 내 동생이니?" 하셨다. 나는 수줍게 "네!"라고 대답만 하고 음료수를 한 잔 따라 드렸다. 장남이라 산에서 공부만 했고 사서삼경 주역을 읽었지만, 옛날에는 그것이 최고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집안에서는 칭찬받던 오빠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우리는 서먹했다. 큰오빠가 자리하고 앉아서 잠시 침묵이 흐르고 언니와 나는 과자만 먹고 오빠들은 줄담배만 피우고 북에서 가져온 아리랑 한 갑, 남쪽에서 가져간 양담배 두 갑이 재로 변해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얼싸안고 울고 엎드려 절도 하는데 오빠는 물 한 잔 마시고 딱 고기 한 점 입에 넣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금강산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우리가 먼저 버스를 탔는데 북에서 온 사람들은 떠나지 않고 서 있다가 우리가 탑승하자 버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창밖 멀리 옥수수밭에선 아이들이 옥수수 걷기를 하는지 옹기종기 모여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황톳길엔 아낙네들이 저녁밥을 지으러 가는지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고, 소달구지에 장작을 싣고 삐걱거리며 가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온정각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금강산 호텔로 갔다. 오빠는 벌써 와서 있는데 오빠의 얼굴이 좀 밝았다. 사과와 배가 그릇에 담겨 있었다. 과일을 깎아 접시에 놓으니 오빠가 과일을 먹었다. 나는 북에서 과일인들 풍족하게 드셨겠나 생각하고 북쪽 큰오빠에게 접시를 밀어놓고는 물었다. "어제는 맛있는 음식이 많았는데 왜 안 드셨어요?" "응~. 갑자기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돼. 어제 탈 난 사람들 많아!" 하셨다. 

큰오빠는 "너 어릴 때 내가 봤다. 엄마가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룻밤 자면서 내가 동생이란 것을 기억한 것이다. 금강산 호텔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 이곳저곳에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 통일기차를 탑시다!" 하며 우르르 일어서더니 앉아있는 사람들을 이끌어다 앞에 세우고 서로 어깨를 잡고 말달리듯이 뛰기 시작했다. 군사훈련 같았고 북으로 납치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식사 후에 삼일포라는 호수로 소풍을 나가는데 안내원이 비닐봉지에 과자와 사탕 몇 개, 사과 하나 담은 것을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고 오빠들과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며 걸었다.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앉자 큰오빠는 소리 없이 울었다. 북쪽 감시원이 오빠 주위를 주시하고 서 있다가 다가와서 "김성한 할아버지! 김성한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주의를 줬고 그 소리에 오빠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북에서 2박 3일을 지내고 남쪽으로 돌아오는 날, 큰오빠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고 우리들은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기쁨에 들떴던 이산가족 상봉은 끝내 아쉬운 이별을 눈물로 달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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