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웅 <변호사/국세심사위원>
한재웅 <변호사/국세심사위원>

 코로나19가 전 국민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범국민투쟁본부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강행했다. 최근 이 단체의 비이성적 행보를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극우정당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민주화된 지 30년을 넘었고 그 기간 동안 우여곡절 끝에 많은 발전을 이뤄냈으나, 정치 영역의 발전은 지지부진이다. 아니 오히려 10년 20년 전과 비교하면 정치인들의 수준이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큰 원인은 정치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정치극단주의는 상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윤리적 잣대로 배제하려고 하려고 하는 ‘악마화’(Demonization)가 정치 영역에서 발현된 것으로서, 극단적인 진영논리로 비합리적 행동이나 태도를 보이는 정치성향이다. 정치극단주의를 보이는 것은 전체주의나 극우, 극좌같이 극단적인 편향을 가진 집단이 대표적이지만, 노골적으로 극단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다른 세력의 공존을 부인하고 제거해야 할 반동으로 보거나 대화와 타협을 배신으로 간주하는 태도 속에는 정치극단주의가 숨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상대 정치 세력을 매국노와 다름없이 간주하는 극한 대결구도가 유지 중인데,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모습이 극복되지 못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자질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대결구도 아래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정치극단주의는 정치에서 논쟁과 설득을 실종시킨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비전이 옳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가지는데 이는 보통 논쟁과 설득이라는 수단을 통한다. 그런데 상대 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빨갱이’이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도 팔아먹는 ‘토착왜구’라면 논쟁과 토론은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거악(巨惡)의 준동에 맞서 싸울 ‘투사’가 필요할 뿐이다. 상대방의 사악함을 입증함으로써 함량미달 정치인이라도 진영에 대한 ‘충성심’만 충만하면 선택받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더불어, 정치극단주의는 정당민주주의도 위축시킨다. 정치적 올바름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저지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므로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며 사실상 배신으로 간주된다. 

 또, 정치극단주의는 반성과 성찰을 방해한다. 같은 진영의 과오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작은 실수나 희생으로 치부된다. ‘정당방위’나 ‘긴급피난’ 같은 것이다. 반성과 성찰보다 오히려 우리 진영의 과오를 제기한 것 자체를 공격할 수도 있다. 작은 흠집을 침소봉대해 거악에 봉사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더 큰 잘못을 지적하면서 역공하는 것도 허락되는데, 거악은 부당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는데 우리는 성인군자처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극단주의적 태도에서 불의한 상대방의 수작에 놀아나는 순진하고 경솔한 반성은 금물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극단주의가 극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되는 이유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각 정치세력이 오랫동안 배타적인 대결구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정치극단주의는 권력을 유지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적대적으로 보이는 두 정치세력은 이 점에서는 이해관계가 부합해 적대적 공생관계가 고착됐고, 정치극단주의는 시나브로 확대 재생산됐던 것이다. 이제 정치극단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세력이 공연히 등장하는 것도 목격되고 있다. 정치극단주의를 각 진영 정치인들이 스스로 극복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눈높이를 높이고 대대적인 인적 청산을 통해서 구태에서 벗어난 정치인들을 등용시키는 방법뿐이다. 당장은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우선 누가 혐오를 부추기고 맹목적으로 이분법으로 선동정치를 하는지 잘 살펴보고, 골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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