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내 집의 거실 벽에는 풍경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언젠가 아우의 화실에 놀러 갔다가 구석진 모퉁이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 그림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져다 걸어 놓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옛 정취가 우러나오고 새록새록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삼십 호 크기 정도나 될까, 추수가 끝난 들판에 제멋대로 휘어진 논둑 끝으로 아스라이 벼 낟가리가 덩그러니 서 있고 후미진 논두렁 둔덕엔 흰 눈이 엉겨 붙어 있으며 그 위로 매서운 바람이 휭휭 부는 듯 아주 고즈넉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그런 그림이다. 

하지만 매양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느낌만 주는 게 아니다. 요즘처럼 추운 날에 이 그림을 보며 밖을 내다보노라면 더욱 마음이 스산해져 겨울다운 겨울을 느껴서 좋고, 여름날엔 얼어붙은 눈덩이가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해 보여서 또한 좋다. 

지금은 남동산단이 들어서고 공장들과 아파트들이 괴물처럼 온 논밭에 들어찼지만, 그때는 ‘범아가리’쪽의 ‘논현초등학교’를 가려면 이쪽 ‘고잔동’ 언덕마루를 넘어서부터 지름길인 허허벌판 논배미 사이로 난 논두렁길로 늘 다녔다.

겨우내 차갑던 바람이 가라앉고 새봄이 시작될 때면 논두렁가의 양지바른 풀 섶에 옹골지게 까놓은 개구리알들이 매일매일 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가 하면, 바람이 쌩쌩 부는 날에 살얼음이 언 논 가운데 논두렁길로 가는 길은 가끔 모험이 필요했다.

잘못하여 논둑길 밑으로 빠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학교로도 갈 수 없고, 도로 집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땐 쥐불이라고 놓고 대충 말려서 신고는 가지만, 뒤보고 밑 안 닦은 것처럼 영 개운치 않았던 기억들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유년의 아릿한 기억들은 잊힐 만도 한데 아직도 부스럼 딱지처럼 늘 붙어 다니고 있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우선 동네에 그만그만한 애들이 많아서 밤낮으로 놀기에 바빴다. 

항상 빠지고, 넘어지고, 찢어지고 이렇게 늦게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 욕바가지에 얻어터지며 자라왔어도 대거리 한번 없이 직수굿이 그때뿐이었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청소하고 늦게 돌아오는 같은 반 친구를 기다린다고 논두렁 밑에서 마른 쇠똥을 굽다 그만 논두렁 위에 올려놓은 벼 낟가리에 불이 옮겨붙어 웃통을 벗어 용감하게 진압 작전을 폈지만, 별수 없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대어 집으로 도망쳐 왔지만, 이내 꼬리를 잡혀 초봄부터 남의 집 장리쌀 꾸어다 먹는 집안에서 쌀 몇 가마니값을 갚기 위해 아버지는 일 년 내내 그 집 머슴처럼 일하며 물어준 아픈 추억도 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을 보며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만 오금이 저려오기도 한다. 

학교에 갔다 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온 들판과 논두렁을 누비며 추수 끝에 혹시 흘린 벼 이삭을 줍던 일……. 그렇게 주워온 벼 이삭은 어머니가 따로 절구에 찧어 늙은 호박과 함께 쪄서 버무리떡을 만들어 온 집안 식구가 둘러앉아 배 채우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남보다 조금 모자라고 양차지 못해 안달해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이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다녔던 그 논두렁길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조촐하고 단순한 삶을 살 수는 없을까? 훨훨 벗어 던져버린 나무숲속을 거닐다 보면 숲이 울창할 때보다 더욱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오늘도 거실에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에서 그런 느낌과 지난날의 나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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