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망국과 3·1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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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망국과 3·1운동(1)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기호일보
  • 승인 2020.02.25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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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매년 거행되는 3·1절 행사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운동이 독립을 가져 와서가 아니라 이 행사를 통해 조선 망국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이 청나라 그리고 일본에 연이어 유린되는 것도 모자라 결국 총 한방 안 쏘고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바쳤냐는 것이다.  이것이 불과 100년 전 일이다. 기억하기조차도 싫지만 면밀히 분석해 후대에 이러한 일이 다시금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역사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이념이 있어야 한다.  어느 한 가지만 무너져도 외부로부터 지켜 내기 힘들다. 특히 국가의 내부 통치 구조로서 통치 이념의 설정은 절대적이다. 수천 년 전 초기 국가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 원칙은 지켜져 왔고, 조선도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을 정했다.

# 성리학적 세계관

성리학은 근본적으로 충효(忠孝)를 근간으로 하는 도덕정치이다. 왕을 중심으로 철저한 신분제를 만들고 각자의 역할이 명확히 주어졌다. 선한 마음을 갖고 자기 신분에 충실하기만 하면 덕(德)을 쌓는 것이고 이로써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념은 공자의 중국 춘추시대처럼 소규모 국가에는 가능하지만 국가 규모가 커지게 되면 덕만 갖고는 어렵기 마련이다. 결국 중국에서도 통일국가 진나라에 법가사상이 나오지 않았는가?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명(明)을 세상의 중심(中華)으로 정하고 조선은 중국의 주변 즉 소중화(小中華)로, 나머지를 오랑캐로 지칭한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임진왜란 명의 원군이 있자 더욱 공고해졌다. 명과 조선 외에는 오랑캐라는 것이다. 청나라가 쳐들어왔던 것도 청의 팽창을 모르고 오랑캐라고 깔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 황제 홍타이치에게 머리를 바닥에 아홉 번 찍는 수모를 겪고 나서야 형식적으로 청을 천자의 나라로 인정했지만 그래도 안으로는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 말까지 수백 년 전에 망한 명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통치이념이 학문적 기반에 두게 되면 그 학문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 성리학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은 체제에 반(反)하는 것으로 역적이 되는 것이다.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중국에서 왔다면 중국을 사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이렇게 경직된 성리학적 세계관이 오직 명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이미 망해 버린 명과의 의리를 그리고 명의 기치를 끝까지 지킨다는 내적 자긍심을 당시 사대부들은 갖고 있었다.  결국 명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한 그 외 세계가 어떤 흐름에 있는지 전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고 통상을 요구해와도 문호를 개방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겐 항상 명이 옳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경제행위는 철저히 부정당했다. 성리학(유학)은 농업에 기반을 둔 것으로 상업을 철저히 배척했다. 농업에서 생산된 것이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업으로 얻는 이익을 극히 천시했던 것이다. 또한 경제행위의 핵심인 화폐도 통용되지 않아 세금이나 거래도 쌀과 면포와 같은 실물로 활용할 정도였다. 강력한 신분제로 인해 세금을 내는 계층인 양인의 수가 적었던 반면 결국 세금이 면제된 양반 세도가만 부를 키웠다. 나라는 가난해져 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불타도 복구를 할 재정이 없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기록되고 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의 헤세 바르텍은 조선 기행기 「조선 1894년 여름」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미개의 나라로 기술하고 있을 정도이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다면 군사력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운용할 군사도 없었을 뿐더러 무기 역량도 매우 뒤떨어 졌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군대를 운영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군대는 왕실을 지키는 군사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군사력에 필요한 병사, 무기, 그리고 전술에 있어 그야말로 300년 전 임진왜란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조선말에 와서 터진 임오군란은 일본 무관이 와서 조직한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와의 충돌이었고, 이후 아관파천 이후에 러시아 무관에게 군대 지도를 받게 한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된 군사교육이었다. 

이외에도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과 부패, 외국 물정에 대한 무지, 양반 계급의 지식 독점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결국 조선이 망한 것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즉, 시대에 뒤떨어진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이로 인해 결과된 군사력 낙후, 그리고 극빈의 경제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조건을 잃어버린 조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지막 희망은 그저 자비로운 외세뿐이었다. 일본이 집요하게 조선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개화파는 끊임없이 일본을 끌어들이려 했고, 민비와 고종 역시 청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만을 꾀했다.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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