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망국과 3·1운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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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망국과 3·1운동(2)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기호일보
  • 승인 2020.02.27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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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민권운동 3·1운동 

합병을 공표한 날 조선은 의외로 조용했다. 오히려 대신들은 합방 기념 행사에 참석해 작위와 은전을 받았다. 지방에서 몇몇 서생이 목에 줄을 매지만 조선반도는 그리 슬퍼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주의 정책을 실시한다.

조선인을 일본 신민(臣民)으로서 인정하되 참정권과 징병권을 제외하는 신분 차별 정책과 식민지 통치가 용이하도록 소위 문명화 작업 즉 국민교육을 시작한다. 이와 함께 조선반도를 식량 기지화하기 위해 토지 측량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합방 전까지 전국에는 약 2천 개의 사설 교육기관이 있었으나 일본은 이들 시설을 대폭 줄이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공립학교를 늘려 나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해외 지식인들이 들어와 세운 사립학교에서 조선인들은 계몽과 함께 민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을 것이다. 3·1 운동은 당시 일어날 환경이 갖춰졌다. 1918년은 1차 대전이 끝나 민족 자결주의가 선포됐고 일본에서도 다양한 민권운동이 파급되고 있었다.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르는 기간이다. 그리고 당일 고종의 일본 독살설에 많은 사람들이 반항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이런 환경에서 일본 한국 유학생들이 2·8 운동을 일본에서 벌인 것이 도화선이 됐다.

3·1운동 당일 33인의 주동자는 바로 경찰에 자수하고, 기독교도, 학생 그리고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약 두 달간 대략 7천500명이 살해됐으며 1만5천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이 운동의 결과로 일본은 외국을 의식해서 문관정치로 바꾸고 잠시 한국어 수업을 허용하는 등 회유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이고 일본은 곧 중일전쟁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확장하면서 일본과 함께 조선을 더욱 무자비한 총력전의 격랑 속으로 몰고 간다. 물론 뜻있는 조선인은 독립군 형태로 만주로 가지만 곧 중국 팔로군과 국민군에 흡수 통합되고, 그 무렵 결성된 상하이임시정부도 큰 역할을 못하게 된다. 내부 갈등과 운용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1운동 25년 후 조선은 승전국이 아닌 해방국으로서 미국에 의해 독립한다. 우리에겐 정말 선물 같은 독립이다. 

결국 3·1운동은 대외적으로 한국의 존재를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던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민족 자강운동에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3·1 운동이 이렇 다할 대가 없이 희생만 컸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중국 쑨원이나 인도 간디처럼 조선 전체를 응집시킬 수 있는 대표자가 없었고 시위 그 이상의 전략도 없었던 탓이다. 

단지 만세운동으로 인해 서구의 주목을 받고 서구의 도움으로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29명이 몰살된 수원 제암리 사건 등으로 인해 조선총독부가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서 다소 문화적인 제스처를 쓴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 필요한 일본 공부  

우리는 일본 문제가 나오면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 호의적인 의견이 나오면 친일이라고 매도하기 일쑤이고,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가 나오면 친일 프레임부터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만큼 감상적인 일본 저주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들어 한일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조선 망국과 일본 치하 30년간의 역사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조선 망국과 3·1운동에 대해서도 시야를 조선과 일본이라는 좁은 시각보다는 당시 제국주의 시대라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봐야 할 것이다. 그때 조선은 과연 어떤 존재였고 무슨 역할을 했는가를 냉정하게 볼 때만이 우리가 감정을 떠나서 객관적일 수가 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관점에서 이때의 상황을 생각할 필요도 있다. 한 예가 일본이나 외국 학자들이 보는 당시 역사의 기술이다.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가 언급했듯이 역사가는 먼저 관점을 정하고 사실을 모으고 기술하는 것이다. 만약 한 가지 관점만을 강요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실을 직시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역사적 한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여러 관점이 필요한 이유이다. 일본이 조선 중기까지는 우리가 보다 앞선 문명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부터는 우리보다 앞당겨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덕분에 앞선 것이다. 단지 차이라면 우리는 중국만을 쳐다봤고 그들은 세계를 쳐다봤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해 왔다. 우리는 역사 속에 멈춰 있었고 그들은 앞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오랜 기간 평화를 누렸던 중국이 전쟁으로 익숙한 서양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처럼 안주하고 있던 조선이 일본을 당해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 일본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들과 공존할 수가 있고 앞설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적인 대응은 결코 외교에서 득이 되지 못한다. 치밀한 연구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를 세우고 합당한 대응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처음 일본과의 수호조약인 강화도조약 후 한일합병까지 무려 35년이 걸렸다.

그동안 일본은 외국으로부터 한국 점유를 인정받기 위해 청일, 러일 전쟁을 치렀고 조선에서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파병, 명성황후 시해 등 수많은 사건을 벌였다. 그들은 만주와 중국으로 뻗을 수 있기 위해서는 조선 점유가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노력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역사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도와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친일이라는 감성적인 프레임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면 조선말 성리학에 갇혀 세계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다시 한 번 겪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일본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과거는 가슴에 묻어 두고 우리와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다. 과거를 잊은 국민은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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