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은 평생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열수((洌水: 한강의 옛 이름이자 자신의 고향인 남양주를 둘러 흐르는 한강을 일컫는 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람은 자신이 나고 사는 산수를 닮는다고 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큰 강을 이뤄 서해로 흘러가듯 서로 다른 학술을 회합해 새로운 학문을 이뤄 다음 세대에 전해준 열수 정약용부터 국가의 위기를 맞아 평탄한 관직을 그만두고 모든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창설에 희사해 민족독립운동을 추동한 이석영 선생. 고려의 충절을 대표하는 불사이군의 변안열, 질곡 많은 역사 속에서 수락산 바위처럼 지조를 지켜낸 자유로운 영혼 김시습, 경세제민을 목표로 조선 후기 실학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김육과 홍만선 등 남양주 역사인물들의 삶은 지역의 산수와 자연을 닮아 있다.

억겁의 세월을 버틴 불암산과 수락산 동봉처럼 남양주의 선현들은 구태를 벗고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애썼다.

이처럼 남양주는 왕릉과 조선왕조의 역사문화유적 등이 산재해 있는 ‘역사의 보고’로, 역사를 빛낸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계층의 중심부이기도 했던 남양주시. 남양주시 남양주시립박물관, 기호일보는 이들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고 인문학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다운 삶의 지침을 찾았던 선조들의 모습에서 혼란이 일상화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내면의 성숙을 갖추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기회를 찾고자 한다. 역사문화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다름을 이해하는 지혜와 공동의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찾는 등 남양주의 역사적 가치를 찾고자 함이다.

본보는 3월부터 9월까지 16회에 걸쳐 남양주시 16개 읍면동의 역사적 위인을 재조명한다.

 

이석영은 일제의 조선 병합이 이루어지자 만주로 이주하기로 뜻을 세웠다. 그림은 이석영과 그 형제들이 망명을 의논하는 그림.(우당기념관 소장)
이석영은 일제의 조선 병합이 이루어지자 만주로 이주하기로 뜻을 세웠다. 그림은 이석영과 그 형제들이 망명을 의논하는 그림.(우당기념관 소장)

올해는 대한민국 독립전쟁사에서 최대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10월 독립군은 6일 동안 치러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천2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 전투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5월 신흥강습소로 시작해 임무가 주어지면 목숨을 바치고, 체력의 한계를 이겨 내고 고통을 인내하며 불의에 항거한다는 정신으로 1920년 7월 폐교될 때까지 3천5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한 이회영, 이상룡, 여준, 이동녕 외에도 청산리 전투의 홍범도를 비롯해 지청천, 이범석 등은 교관 출신이다. 의열단의 김원봉, 광복군 1지대장 송호성 등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다. 이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1920년대 만주 독립군 항전의 바탕이자 민족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핵심이었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이석영 선생의 삶을 돌아본다.

이석영 선생 초상화(왼쪽),이석영의 동생 우당 이회영.
이석영 선생 초상화(왼쪽),이석영의 동생 우당 이회영.

# 나라를 위해 풍요로운 삶을 버리다

이석영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그는 조선 최고 명망가의 인물로 높은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당시의 다른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1913년 다나까 코죠의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 따르면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 황실 가족 외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의 벼슬아치만 69명에 달한다. 이를 감안하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값진지 알 수 있다.

그는 1855년 한성의 저동(苧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건(仲建)이고, 영석(氵 + 頴 삼 수 + 이삭 영 石)은 호이다. 1885년(고종 22) 30세에 문과에 합격해 승지, 비서원승 등을 지냈다. 31세 관직에 오른 이후 18년 동안 주로 왕명 출납을 담당하고 경연을 진행하는 승정원에 있었다. 종2품의 장례원 소경을 마지막으로 지냈으니 권력의 핵심에 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유와 신념,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이석영 선생은 1893년 건청궁에서 참찬관으로 고종을 대면한 자리에서 임금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권세를 부리다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 밖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 모면하려는 사람을 향해 역사적 진실을 들어 맹판히 비난했다. "이런 사람은 국가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흉악한 도적보다 심각한 죄를 짓는 인간이다"(「승정원일기」 참고)라고 평가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재 중 하나. 남양주의 인물 정약용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재 중 하나. 남양주의 인물 정약용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이어 "내부의 부도덕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전횡보다 외부의 세력을 불러들이면 나라에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망하고 만다"(「승정원일기」 참고)며 거듭 외부 세력의 유입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종에게 말했다.

이는 조선과 고종에게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매우 위험함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청일전쟁과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조선의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황실과 주요 관료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세력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그 결말은 망국이었다.

# 풍전등화의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이석영 선생은 국가 위기에서 보여 준 나약한 조선의 현실에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이에 1904년 관직을 사직하고 은거에 들어가 침통한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1910년 조선이 망하자 1910년 겨울 55세의 나이로 모든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핵심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그의 헌신 없이 설립될 수 없었다. 그는 6천 석의 토지와 가옥 등 전 재산을 팔아 당시 조선 3대 은행의 자본금인 32만5천 원보다도 많은 40만 원을 마련했다. 요즘 시세로 치면 수조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석영은 이를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 육성에 모두 쏟아부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그는 남만주와 북만주를 오가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1934. 2. 28)에 실린 이석영 영면 애도 기사(왼쪽). 매일신보(每日申報)에도 1934년 3월 16자에 이석영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실렸다.
동아일보(1934. 2. 28)에 실린 이석영 영면 애도 기사(왼쪽). 매일신보(每日申報)에도 1934년 3월 16자에 이석영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실렸다.

# 지독히도 가난했던 말년, 쓸쓸한 죽음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사이 그의 모든 재산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으로 소진됐다. 말년엔 자신의 몸조차 돌볼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1933년 병이 심해져 피를 토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1934년 봄 향년 79세의 나이에 숨졌다.

장례조차 치르기 어려울 만큼 가난해 몇몇 친구의 모금으로 겨우 장례를 치렀으며, 중국 상하이의 공동묘지에 묻히는 등 그의 최후는 쓸쓸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상하이에선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언론에서는 ‘서간도로 이주해 신흥학교를 세운 일등 공신이고, 이역의 땅으로 이주한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며 신흥학교 경영에 전 재산을 바쳤다. 그는 평소 곤궁한 생활에도 조금의 원성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았다’(이석영 씨의 공(功), ‘한민 제3호’)라며 그의 공로와 사람 됨됨이를 알렸다.

부인 박씨는 1936년 사망했고, 그에 앞서 큰아들 이규준은 친일파와 밀정을 처단할 목적으로 김창숙 등이 설립한 다물단(多勿團)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숨졌다. 이로써 부부가 2년 사이에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송상도(宋相燾, 1871~1946)가 지은 '이석영의 전기'에 따르면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고 원수들 앞에서 아부하면서 살 수 없어 비분강개함으로 대한독립의 뜻을 두고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이석영의 가슴에는 늘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마음의 충효 두 글자가 자리했다’(「기려수필(騎驢隨筆」 참고)고 기록돼 있다.

# 수충부정, 현대의 우리는 어떠한가

이석영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남양주시 수동에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유일한 작품이 남아 있다. 귤산 이유원의 묘비에 남아 전하는 ‘귤산공묘표후기(橘山公墓表後記)’가 바로 그것이다. 찬자가 이석영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친필 작품이기에 더욱 주목을 끈다. 

이 묘표후기에서 그는 ‘수충부정(輸忠扶正)’을 강조하고 있다. ‘충성을 다하고 정의를 지켜낸다’란 의미로, ‘기려수필’에서 ‘충·효’ 두 글자가 가슴속에 있다는 평가와 일맥상통한다. ‘수충부정’ 네 글자는 바로 이석영 정신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남양주 굴운천 상류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고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동계곡과 함께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정신도 흐르고 있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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