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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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단상(斷想)
이석범 광주시 부시장
  • 기호일보
  • 승인 2020.03.10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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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광주시 부시장
이석범 광주시 부시장

성곽이 있는 도시는 아름답다. 정조대왕이 축조한 화성(華城)이 있는 수원도 그렇고 공산성(公山城)이 있는 공주도 그렇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는 우리 광주도 아름다운 도시다. 성(城)은 석재가 내뿜는 고즈넉한 색감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계절을 달리하며 멋스러움을 연출한다. 봄철 담쟁이가 성곽을 타고 오른 모습, 한여름 짙은 녹음과 성곽이 어우러진 모습, 겨울 성곽이 소박한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은 달력의 흔한 사진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해 축조됐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그 이전에도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며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 연주봉(467.6m), 동쪽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축조됐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해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렵다. 성이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많은 시설들이 사라졌지만 남한산성에도 도시의 기능을 하는 관청과 시장, 주택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고 경제적 활동을 하며 성(城) 안의 삶을 꾸려 나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해장국인 효종갱(曉鐘羹)의 원조가 남한산성이라는 것만 봐도 남한산성 동네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번성했나를 알 수 있다. 번성했던 서울 한복판의 청진동과 관철동에서 해장국이 잘 팔렸듯 남한산성 해장국인 효종갱도 멀리 서울 북촌까지 배달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남한산성을 치욕적인 장소로 기억되게 한 병자호란은 기나긴 산성의 역사 중 극히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오래도록 융성한 문화와 경제를 누려온 삶의 터전이었고 든든한 방호벽이었다. 남한산성은 광주시에 자리를 잡고 있다. 남한산성 서쪽은 성남시, 북쪽은 서울 송파구, 동쪽 일부는 하남시에 접해 있다. 예전에는 이들 지역이 모두 광주였다. 그러니 남한산성은 광주 문화의 중심이고 광주 역사의 상징인 것이다. 지금도 남한산성 자락 광주시 남한산성면에는 2천7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광지원 농악과 산성 막걸리 등 남한산성 문화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2014년 6월 유네스코가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들 산성 주민들의 전통계승이 큰 몫을 했다.

임금이 머물던 행궁이 복원됐고 각종 성곽 시설에 대한 복원도 이뤄졌다. 이제는 산성의 시설 복원을 넘어선 문화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산성 마을 시장과 주택, 대장간, 창고 등 그 옛날 남한산성에 자리 잡았던 융성한 문화들이 복원돼야 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대한민국 산성 문화와 광주의 역사를 재현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물론 치욕과 아픔의 역사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산성’ 남한산성의 축조 과정과 전략적 가치, 산성 안의 경제와 문화, 민초들의 삶, 외세 침략에 맞섰던 기록 등을 생생하게 복원해 산성이 간직한 천년의 역사를 후손들도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이 광주의 역사이고 광주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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