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사무처장
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사무처장

사진첩을 들추다가 흑백사진 몇 장에 눈길이 멈췄다. 만국공원에 있는 맥아더동상 밑에서 형과 함께 찍은 사진과 동상 앞쪽 화단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가족사진은 흑백이라서 꽃의 화려한 자태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잘 가꿔진 공원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1976. MAY’라는 글씨로 보아 초등학교 6학년 5월에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갔던 것 같다. 

공원 정상에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는 곳은, 계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 제물포구락부다. 당시 그곳은 인천시립박물관으로 1980년대 말까지 사용됐다. 공원에 올라가게 되면 으레 한 번씩 들러보던 박물관. 그곳에는 커다란 ‘맘모스의 상아’가 전시돼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인천광역시의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에는 장소가 협소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추억의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시립박물관이 1990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한 후 관람을 위해 박물관을 찾아간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접근성이 너무도 나쁘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그런데 접근하기가 어렵다면 그 존재 이유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2018년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의 입체적·맥락적 보존과 활용을 통한 도시 재생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해 ‘선(線)·면(面)’ 단위 문화재 등록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그 결과 첫해에는 목포, 군산, 영주 등 3곳이 선정됐고, 2019년에 익산, 영덕, 통영 등 3곳을 새롭게 선정했다. 

1883년 개항되면서부터 우리나라 근대문화의 창구 역할을 해왔으며, 아직도 곳곳에 수많은 근대유산이 남아 있는 인천이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 사업에서 제외됐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개항장 또는 근대문화거리라는 측면에서 인천시 중·동구와 전라북도 군산은 종종 비교되고 있다. 인천과 군산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문화유산을 형성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쌀 수출항으로, 한국전쟁기에는 상륙작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입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 본격화된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근대건축 문화유산을 새로운 용도의 건축물로 재활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원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런데 인천과 달리 군산에는 2011년 9월 30일 문을 연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근대기 군산의 역사적 현장을 보존 및 활용해 전시 및 문화 예술공간으로 조성하는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에서 박물관 개관은 그 규모나 상징성에서 사업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2018년에 발행한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팸플릿을 보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거점으로 호남관세박물관, 근대미술관(옛 18은행), 근대건축관(옛 제1은행), 부잔교(일명 뜬다리) 등을 하나로 묶어 통합권을 판매하고 있다. 이외에도 무료 관람이 가능한 5곳 등 총 9곳을 선정해 스탬프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미션을 완료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같은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의 개항장에는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이들 건축물뿐만 아니라 개항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은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기억의 장소이다. 김구 선생과 연관된 감리서와 축항, 3·1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예비 모임 장소였던 만국공원, 최초의 학교 및 종교시설, 일제강점기 이후 조성된 산업시설, 인천상륙작전 등등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문화적 사건이 넘쳐난다. 그런데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전시해 주는 곳이 없다는 것이 인천의 현주소이다. 이를 위해 개항장을 아우를 수 있는 ‘인천근대역사문화박물관’ 설립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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