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오래 전 향토 원로의 글에, "각국지계 첫머리(송학동 3가)에 순 한국식 건물의 한 집단이 있었는데, ‘순신창(順信昌)’이라는 객줏집의 다음 집이 ‘담손’이란 애칭으로 불리던 ‘타운센드 상사(Townsend & Co.)’의 옛 터전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덕분에 인천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팀정미소를 운영했던 타운센드 상회의 ‘담손이 방앗간’을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다. 

몇 줄 되지 않는 글이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함축돼 있다. 미국 무역상 타운센드는 물론 ‘순신창’이라는 객줏집도 그렇고, 이와 관련돼 인천 개항장에서 다양한 활동과 경제적 부(富)를 쌓았던 서상집(徐相潗)의 역정(歷程)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제물포가 개항되자 조선에서의 이권 모색을 위해 이화양행, 세창양행, 타운센드, 홈링거 상회 등 각국의 상사(商社)들이 경쟁하듯 진출했다. 당시 인천항의 조선인 회사로는 1883년 하반기 반관반민의 순신초상회, 장춘사, 대동상회가 처음 개설됐다. 순신초상회(順信招商會)는 이후 순신상회, 순신회사, 순신창상회 등으로 불렸다. 순신창상회는 사장 민응식, 부사장 신기선, 그리고 서상집과 서상옥이 직원으로 있었던 일반 상회사(商會社)였다. 주업종은 국산품 수출과 조선 주재 구미인들을 위한 수입 무역업이었으며 여관업도 함께 겸했다. 

조선인 상회사가 서구인의 상사에 비해 경영이나 재정의 어려움이 많았던 듯, 1884년 궁궐에서 쓸 종이를 모스&타운센드 상회에서 구입·상납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순신창상회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모스&타운센드 상회에 인수되었거나 적어도 자본이 풍부한 미국상회와 동업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순신창상회가 1885년 경영 곤란으로 폐점하려는 시점에 인천 각국 거류지 소재 순신창 가옥을 타운센드가 매입해 들인 것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더구나, 당시에 타운센드 상회를 미상순신창(美商順信昌) 혹은 미상순신상회(美商順信商會), 순신창행담생(順信昌行淡生)으로 기록하고 있고, 직원이었던 서상집이 갑오개혁 시기에 관허 회사 혁파조치로 순신창상회가 폐지되기 전까지 모스&타운센드 상회의 조선인 관리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타운센드가 자본기반이 취약했던 조선 상회사 순신창을 인수하고 중요 사업인 내륙 미곡무역을 시작하자 이를 전담해 인천에서 한강을 통해 김포, 마포, 용산에 이르는 수도권 수로 중심선을 무역의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서상집은 인천 개항장에서 국내외 상인과의 관계망을 활용해 경제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그의 행적은 상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양해 개항 초기에는 미국계 타운센드 순신창상회의 대리인으로 활동하고(1888) 갑오개혁기에는 공동회사(公同會社, 1895)를 세워 조세상납 대행 및 미곡무역, 해외로의 홍삼무역을 꾀했다. 또, 신상회사(紳商會社, 1896)를 조직해 일본인 상인단체에 대항하는 한편, 이 시기에 해운업, 조선업, 금융업에 뛰어들어 인천의 부호 부상, 대표적 자본가로 성장했다. 한때, 전환국 기사를 지내기도 했으며(1898), 내장원에서 1899년 설치한 인천 황곡의 장토인 황장(皇庄)의 감동(監董)을 맡기도 했다.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장(1899)과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천감리(1902.7.~8.)를 지내기도 했다. 

서상집의 활동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혹자는 매판(買辦)자본의 유형으로 보고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을 중개한 전형적인 주변인으로 두 문화 중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문화혼혈아였다고 평가하지만 보다 종합적인 평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시각에서, 인천 개항장의 역사성을 활용한 도시재생사업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테마를 연출하기보다 이런 역사 콘텐츠를 통해 작은 ‘표지석’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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