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전 산업연구원 부원장>
심영섭<전 산업연구원 부원장>

실패란 어느 경우든 달갑지 않다. 실패는 쓰디쓴 결과물이다. 그러나 실패를 실패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좌절하는 이는 미래가 없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요즘 봉준호 감독을 성공한 이로만 치부한다. 칸영화제를 석권하고 문턱이 높기로 유명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을 거머쥐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성공에 이르는 그의 길에도 실패가 도사리고 있었다. 20년 전 데뷔작으로 ‘플란다스의 개’를 개봉했을 때의 일이다. 개봉 첫 주 무대 인사를 하러 나섰을 때 그는 텅 빈 객석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고 한다. 스토리가 엉망인 영화를 두고 그는 실패를 곱씹곤 했었다. 마지막 결과만을 놓고 보면 성공한 인물이지만, 그도 그렇게 실패 과정을 거쳤다. 비단 그뿐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공의 열매에만 열광하고 환호한다. 그 험난하고 쓰디쓴 경험과 역정은 공유하려 들지 않는다. 실패의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요즘 국내외에서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이 한창인데, 그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패가 밑거름이 될지 모를 일이다. 완치된 환자의 혈액에서 항체를 찾아내고, 어떤 항체가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는데 효능이 있는지를 판별하고, 임상용 항체를 개발해서 여러 단계 임상실험을 거치는 과정은 간단하지가 않다. 이미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세계적 대유행을 의미하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 마당이니 백신 개발은 절박한 과제이지만, 그 과정은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모든 과정이 우연한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험실의 시행착오가 거듭되면서 진척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찍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도전적인 융합 촉진을 위해 실패 성과를 체계적으로 축적해 나가자고 제안한 바가 있다. 요즘 융합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융합’이란 것이 ‘금 나와라 뚝딱!’ 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다양한 결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수없는 실패를 거듭한 다음에야 그 성과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모하리만큼 도전적인 시도와 실패는 그 자체가 성공의 한 과정으로 간주돼야 마땅하다. 실패 성과를 체계적으로 축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실패를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다. 우리 사회는 과연 실패에 관용적인 문화인가 아니면 인색한 문화인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경험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013년 1월에 발사된 나로호는 그 이전에 두 번 실패하고 두 번 연기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패와 연기를 거듭하는 동안 정부와 국회, 언론 등을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기 일쑤였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때마다 성공에 대한 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고, 육체적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 과정을 통해 그만큼 더 학습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는 드물었다. 이때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는 2018년 11월 자체 개발한 엔진 시험발사체인 ‘누리호’ 발사에 성공했고, 결국 세계 7번째 발사체 엔진기술 보유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요즘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블라인드 채용이 유행이다. 학력이나 스펙 등과 같은 성과를 보지 않고 인재를 뽑겠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 지원자의 실패 경험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원자 자신이 실패 경험으로 축적된 자산이 얼마라고 여기며, 그는 그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인재발굴의 기준으로 삼아보자는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면 우리 사회도 과감한 실험 도전과 실패를 권장하는 문화가 좀 더 폭넓게 뿌리내릴지 모를 일이다. 실패를 무형의 ‘경험자산’으로 간주하는 사회문화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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