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희 시인
최영희 시인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환희롭다. 흙내음 풀 내음을 맡으며 자랐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봄이 되면 산천초목 우거진 숲길이 더 그리워진다. 분주한 일상과 도시 생활에 길이 들었지만 가끔은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연 속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솟을 때가 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꽃잎의 찬란함은 경이롭다. 흐드러진 봄꽃을 따라나서는 상춘객이 되고 싶다. 자연을 벗하는 일은 무한한 평온과 겸허함을 내게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이 멀리 있으니 가까운 거실에 몇 개의 화분이라도 길러 본다. 집안 공기를 정화해 준다는 이익에서가 아니라 나무가 주는 힐링 때문이다. 햇빛 잘 드는 창가 쪽에 자리한 화분들은 잘 자란다. 연두의 빛깔이 찬연한 색을 뿜는다. 침묵 속에 흐르는 잎들의 속삭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싱그럽다.

기르는 화분 중에 어린 고무나무가 있다. 어린싹의 밑둥을 잘라 다섯 개의 가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지개를 켜는 봄날 우연한 발견을 했다. 화분들 사이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는데 다섯 가지 중 유독 한 가지만 그 줄기가 쑥쑥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가지들은 옆에 놓인 화분 때문인지 자라지 않고 거의 그대로다. 식물도 힘 있는 녀석이 영양분을 빨아들여 독불장군인 모양이다. 얼른 방향을 돌려놓고 골고루 자라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몇 년째 자라고 있는 행운목도 있다. 그 녀석은 새잎이 잘 나오면서도 군데군데 누렇게 변해갔다. 왜 그럴까. 의아한 생각에 마음먹고 화분갈이를 해주려고 화원을 찾았다. 요즘 화원에서는 인건비가 비싸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분갈이를 해 줄 수 없단다. 체감경제를 실감한다. 하는 수 없이 퇴비를 사서 집으로 왔다. 

화분갈이를 하기 위해 단단히 자리 잡은 행운목을 뿌리째 뽑아 들고는 깜짝 놀랐다. 뿌리가 무성하게 자라다 보니 공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실처럼 생긴 잔뿌리들이 뻗을 곳이 모자라 제 몸을 스스로 칭칭 돌려 감고 있는 게 아닌가. 그동안 무심했던 탓이다. 화분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다. 강인한 생명력에 절로 감탄했다.  

크고 넉넉한 화분에 행운목을 옮겨 심었다. 낑낑대던 잔뿌리들이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화창한 봄날에 편안히 자라리라 생각하니 뿌듯했다. 누렇게 변하던 잎들이 싱싱한 초록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눈길을 준다.

코로나19의 사회적 우울감 속에 봄이 왔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봄날이 코로나 때문에 온통 암울해졌다. 음식점이나 쇼핑센터는 개점휴업 상태다. 거리도 썰렁하다. 거실에 들여놓은 봄빛만으로는 봄이 왔음을 느끼기에 부족하다. 자연이 연출하는 봄의 향연을 맞이하러 들길로 나서보고 싶다. 노랑, 분홍의 여린 꽃잎들이 하늘거리고 있으리라.

화분갈이로 대체하는 작은 봄이 아니라 넓고 탕탕한 자연 속의 봄을 찾아보리라. 힘차게 기지개 켜는 새싹들의 행진이 보고 싶다. 봄꽃이 전해 주는 은은한 밀어가 삶의 기쁨을 선사하리라.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새싹의 경이로움은 또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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