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11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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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111주년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20번길
  • 기호일보
  • 승인 2020.03.26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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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20번길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20번길

청소년 시절부터 안중근 의사는 인천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시민들에게 계몽 활동도 했다. 독립신문을 즐겨보던 안중근 의사는 신문 내용을 시민들에게 설명해 주는 계몽 활동을 펼쳤다. 인천에서 생활하며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의 나라를 위하겠다는 사상이 청년 안중근의 가슴에 움트고 있었던 곳이 인천이었다. 일본을 배척하자는 배일사상이 싹트고 고조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일본은 놀라워 하며 단속과 경계에 나서고 있을 때 안중근 의사는 인천에서의 생활을 접고 친분을 교류하며 뜻을 같이했던 정운복이 평양에서 창립한 제국신문과 서북학회의 회계주임 김하달의 아들 김세하와 같이 북한·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동포들이 많은 러시아 연해주로 떠난다. 

그곳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러시아, 상하이, 미국에 든든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대한제국 고종 임금의 신뢰와 총애를 받고 있는 이범윤·이범진 등이 이끌고 있는 배일주의 결사동의회 단체와 어울려 독립운동 활동을 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에 나선다는 첩보를 알아내고 그를 암살하고야 말겠다는 조용하면서도 치밀하게 의거 계획을 세우며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격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의 자주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계획은 대한제국의 현실과 대한청년들의 용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의거활동에 나서는 믿음직한 멤버는 안중근·조도선·우덕순·유동하 4인의 대한제국 청년들이었다. 

조선통감직을 사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인천 만석부두에서 중구원의장 김윤식과 같이 만주호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며칠 후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시찰과 러시아 방문을 위해 시타오호를 타고 중국 다롄으로 떠난다. 만주시찰을 마치고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러시아 정부 인사 코노시오푸가 열차 안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하고 하얼빈영사관 카와카미의 안내로 열차에서 내렸다. 러시아·중국의 군대와 외교관들이 정렬된 앞으로 다가서 인사를 나누려는 시기에 군악소리 폭죽소리로 주변이 어수선한 틈에 군중들을 헤치고 나온 안중근 의사의 비호 같은 몸동작으로 오른쪽 주머니에 소지하고 있던 7연발 권총을 손에 쥐고 쏜 탄환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고 오른쪽 복부에 3발이 명중된다. 안중근 의사를 바라보며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보내는구나! 탄환에 당하는 구나!"라고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수행원 나카무라와 러시아 관원의 부축을 받고 열차 안으로 피신해 주변에 있던 일본인 사코야마의 응급처치를 받고 러시아 병원으로 후송된 지 30분 후 숨졌다. 

일본 논설자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개죽음 당했다고 표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완용 일행은 인천 만석부두에서 광제호를 타고 중국 다롄에 도착 이토 히로부미를 위문했다. 일본 군함 아키슈우호로 이토 히로부미 시신이 일본으로 운송되고 화장해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묘는 도쿄 오오모리온모즈칸 부근에 있다. 대한제국 정부 측에서 위문단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얼빠진 친일단체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흉상을 세우자는 의논을 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안중근 의거에 연루됐다고 도산 안창호를 평양에서 체포해 심문하는 일도 있었다. 배일적 논설이 염려돼 우리글 신문을 구독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이 통감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나오기도 했다. 1910년 2월 14일 만주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장 마나베에 의해 진행된 판결에서 평남 진남포 출신 안중근 31세 사형, 서울동대문 양사동 출신 우덕순 34세 징역 2년, 함남 홍원군 경포면 출신 조도선 38세와 함남 원산 출신 유동하 19세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받는다. 일본 정치를 대표했던 인물이었고 일본 헌법 초안을 작성한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보기 좋게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은 3월 26일 중국 뤼순감옥소에서 집행됐다.

의거 111주년을 맞이해 인천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활동을 되짚어봤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하고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다. 유해를 찾을 수 있는 자료가 있는데 우리가 못찾고 있을 수 있다. 인력과 예산을 갖추고 있는 관계기관이 적극 나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에 일본으로 주고 받은 외교 서신과 경찰의 상황보고 통지문을 엮어 발행된 책들을 샅샅이 검토하는 일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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