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가수 최백호가 부른 대중가요 "낭만에 대하여’ 2절 가사 내용이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가는 많은 이들은 아마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을 ‘낭만’이란 말을 가끔 떠올릴 것이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탱고 리듬의 이 노래 가사가 큰 몫을 했을 것 같다. 

낭만(浪漫)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감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를 말한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유럽에서는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중시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물결이 일어났다. 비현실적인 꿈이나 환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감상적인 정서를 중시하는 이런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思潮)는 음악과 문학, 미술, 건축 분야 등에 유행했다. 당시 만연했던 사회의 분열과 이기주의를 부정하고, 개성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싶은 예술가들의 소망이 행동으로 번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20년대에 문학을 중심으로 낭만주의가 일어나긴 했지만 엄혹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낭만적 정열보다는 오히려 비탄(悲歎)과 허무(虛無)에 빠져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어떨까? 낭만이란 말을 쓰긴 하지만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이나 엉뚱한 행동에 대해 실없는 농담(弄談) 정도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가끔 낭만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 혹은 TV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하고 공감하면서 ‘낭만’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곤 한다. 수년 년에 방영했던 TV 드라마 ‘미생’이란 작품이 있었다. 이 드라마는 정규직 사원과 비정규직 사원으로 대비되는 회사 내 구조적인 비합리와 애환(哀歡)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서 당시 세간(世間)의 화제(話題)가 됐다. 검정고시 출신의 주인공은 정규직 전환을 꿈꾸고 있는 비정규직 인턴사원이다. 정규직 사원 이상의 실력을 여러 번 입증했음에도 비정규직이라서 받는 차별은 여전하다. 회사의 모든 비정규직 인턴사원의 소망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지만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는 실력과는 상관없이 검정고시 출신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적이 없다. 그런 회사의 사정을 잘 아는 주인공의 상사(上司)는 회사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회사의 주류(主流)에 맞서고, 비정규직 편을 들어주는 상사, 이런 ‘낭만 상사’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최근에 끝난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관심을 끌었다. 잘 어울리지 않는 ‘낭만’과 ‘닥터’를 제목으로 쓴 게 좀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며 흥미있게 시청했다. 주인공은 대학병원의 실력 있는 외과의사였지만 부도덕한 의료 권력과 맞서다가 밀려난다. 산골의 작은 병원에 다시 자리를 잡은 주인공은 뛰어난 의술과 정의감, 인간애로 동료 의료인들로부터 ‘사부(師傅)’로 불리며 지낸다. 주인공은 환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처지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수술과 치료에 최선을 다한다. 곤란한 입장인 동료를 위해서도 본인 모르게 도움을 주며 용기를 준다.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세속적인 의사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지라 사람들은 그를 ‘낭만 닥터’라고 부른다. 

드라마의 ‘낭만 주인공’들은 분명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캐릭터(character)다. 그러나 높은 시청률이 증명했듯이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속 깊이 낭만을 동경(憧憬)하며 산다. 그러면서 옳다고 믿는 것을 정의롭게 지켜나가는 또 다른 ‘낭만 주인공’들을 기다린다. 사리사욕(私利私慾)보다는 공공(公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낭만 정치인’, 양심에 따라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낭만 법조인’, 기업윤리를 강조하고, 근로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낭만 기업인’…. 각박(刻薄)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사회에 이런 낭만적인 사람들이 차고 넘쳐 났으면 정말 낭만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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