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서울 근교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는 남양주였고, 그 중에서도 단연 ‘뱅이(현재의 퇴계원)’를 최고로 꼽았다.

 문헌상에 토원(兎院), 퇴천(退川), 퇴조원(退朝院), 성곡(星谷), 백양곡(白楊谷), 백양곡(白羊谷) 등 다양하게 등장하는 퇴계원은 왕조의 역사문화 유적과 연관성이 많고,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 왕들이 행차하다 쉬어 가거나 크고 작은 군대 사열과 훈련으로 왕실의 위용을 과시하는 곳이었다.(「세종실록」 참조) 

 심지어 연산군은 사냥터로 삼고 백성들을 내쫓기도 했다.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함경도와 경상도로 통하는 장사꾼과 여행객이 많은 지역이라고 설명했다.(「퇴천게려기(退川憩廬記)」 참조)

 그만큼 퇴계원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한강 건너 번창한 사평시장과 남한산성으로 오가는 물자 등이 어우러진 교통·상업 중심지였다.

 이는 서민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풍자와 해학으로 인간의 욕망을 들추고 도덕의 굴레를 벗어 현실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한 퇴계원산대놀이를 탄생시켰다.

퇴계원 함평이씨 재실.
퇴계원 함평이씨 재실.

# 이항, 남양주 명문가로 국가의 위기 국면을 진정시키다

 이하조(李賀朝·1664~1700)는 시를 지어 "이 씨 집안이 이름난 호수를 차지하고, 꽃과 버드나무 누대를 가렸네. 그림 속 같은 풍광이 은근히 비쳐 온다(「백양곡(白楊谷)」 중에서)"라고 퇴계원의 풍광을 묘사했는데, 여기에서 이 씨 집안은 퇴계원 함평이씨를 지칭하는 듯하다.

 함평이씨는 이곳에서 500여 년의 대를 이어왔다.

 조선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외갓집으로도 알려진 남양주의 함평이씨는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고 함녕군(咸寧君)으로 봉해진 이항(李沆·1586~1637)대(代)부터 명성을 얻었다. 

 이항은 무과에 급제해 승승장구하던 중 광해군의 내정 실패와 왕후 폐위 등을 비판하며 김류, 최명길 등이 추진하는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했다. 반정 이후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직접 훈련한 군사를 이끌고 평산산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명청 교체기엔 함경도에서 도병마절도사를 3번 지내며 국경의 수비를 책임졌다. 함경도 관찰사로서 청나라가 회령(會寧)에서 시장을 열며 조선의 영역에 들어오면 모두 포로로 잡아 엄격히 다뤄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했다.

 이렇듯 이항은 국가 위기 국면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이항의 신도비. 소나무와 함께 신도비가 서 있다.
이항의 신도비. 소나무와 함께 신도비가 서 있다.

# 함경도에서 강행군으로 달려왔지만, 임금을 구원하지 못하다

 이항은 호란(胡亂)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방면으로 전쟁 대비를 위해 노력했다. 함경도의 성벽 수축과 군량미 비축을 수차례 건의했고, 청나라의 전쟁 준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에선 남쪽 지방의 형평도 어렵다며 묵살했다.(「인조실록」 ‘인조 8년’ 기사 참조)

 북병사로서 이항은 북방의 9개 읍 30개 보를 정비하고, 성곽과 전투 장비를 수리하면서 청나라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때로 발생하는 적의 도발을 단호하게 응징했다.

 이항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즉시 나섰다. 포수 등 날랜 군사를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매서운 눈보라와 강추위를 무릅쓰고 함경도에서 양근협(지금의 양평군 양서면)까지 쉬지 않고 진격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데다, 강력한 청나라 군대와 교전을 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곧 이은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이항은 함경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전투에는 패배했어도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인조의 항복으로 청나라는 자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선 백성을 상대로 노략질을 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조정과 인조는 충돌을 우려해 청군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데만 급급했다. 백성들에게 피하고 숨으라고만 했지, 누구도 나서서 백성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청군과 전투하지 말라는 인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항은 조선의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잡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조선 백성을 노략질하는 청군과 갈등을 빚더라도 조선 백성을 지키려 했다.(「인조실록」 ‘인조 15년’ 기사 참조)

 조선의 위정자들은 호란의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총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임금이었지만, 인조와 조정의 중신들은 전투에서 실패한 장군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 중심에 이항이 있었다.

 이항은 임금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무능한 장수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유배를 떠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바로 복권됐지만 권력 계층을 중심으로 이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계속됐다.

 장거리 이동으로 불가항력이라고 변호해 준 최명길은 "역사책에 중흥의 공이 기록되었으니 충분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심동구(沈東龜·1594~1660)는 "여러 번 절도사에 올라 위엄과 혜택을 베풀었고, 변방을 방비하며 명성을 높였네. 길이 막혀 임금을 지원하지 못해 아깝게 죽임 당하였네(「이항의 만시」 중에서)"라며 이항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이항의 묘. 삼향산 자락에서 퇴계원 앞 뜰을 바라보고 있다.
이항의 묘. 삼향산 자락에서 퇴계원 앞 뜰을 바라보고 있다.

# ‘연구보국(捐軀報國)’의 정신으로 전하다 

 이항의 삶은 ‘연구보국(捐軀報國)’, 즉 ‘온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이항은 체구가 작았지만 정신이 맑고 빼어나 무신이었음에도 선비 정신을 갖춰 독실하고 청렴결백해 재물욕이 없었다. 여러 변방 지역을 관리하며 직접 나가 병장기를 수선하고, 병사와 백성을 직접 위로하는 것을 늘 우선시했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칭송했다.

함평이씨 마을의 향산정이 있었던 삼향산.
함평이씨 마을의 향산정이 있었던 삼향산.

지금까지 이항은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병자호란 이후 정권을 잡은 지배층에 의해 무능하고 군율을 어긴 장수라는 평가가 내려져 인습된 탓이다. 당시 지배층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한 장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매도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권력을 가진 승자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왕숙천의 맑은 물이 내려다보이는 퇴계원 삼향산(三香山) 자락에, 한 그루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그의 조촐하고 아담한 신도비가 아직 남아 이항의 절개와 충정을 증언해 주고 있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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