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의 ‘파도 위에서 춤추기’라는 글에서 눈이 멈췄습니다. 

"삶의 무대에서 몰아치는 파도와 만나면 누구나 주저앉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파도가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두 손에 꼭 쥔 열정을 놓치지 않는다면, 열정으로 벅찬 가슴을 믿는다면, 그 무대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꽤 오래전에 강수진 무용수의 발 사진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발이었습니다. ‘강수진’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우아한 학처럼 하늘을 날던 그녀의 아름다운 발레만을 상상했지만, 그녀의 발에서 묻어나는 그동안의 처절한 고통과 인내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 자신이 얼마나 안이하게 살아왔는지를요.

「지혜의 한 줄」이란 책에 유명한 화가가 자신의 성공비결을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수영, 피아노, 그림, 농구 등 모든 방면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모든 방면에서 최고가 되기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러는 동안 학교 성적은 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깔때기 하나와 땅콩을 가져오더니, 아들의 손에 깔때기를 주며 그 안으로 땅콩을 하나씩 집어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 땅콩은 단 한 개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아들의 손바닥 안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이번엔 땅콩을 한꺼번에 모두 깔때기 안으로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단 한 개의 땅콩도 깔때기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보아라. 이 깔때기가 바로 너 자신이란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씩 해나가는 사람은 그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지만, 한 번에 다 하겠다는 욕심을 부렸다가는 이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단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고 그것에 온몸을 던지는 것이 강수진 예술감독이 말한 ‘열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열정이 있었기에 발이 뒤틀리는 아픔과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게 했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란,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산책」이라는 책에 한국전쟁을 취재하던 ‘라이프’지의 종군기자가 쓴 글이 나옵니다.

1950년 12월이었습니다. 미 해병은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중공군 대병력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며 다행스럽게도 함흥으로 철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초췌한 모습으로 길가에 앉아 꽁꽁 언 통조림을 포크로 파먹고 있는 병사가 보였습니다. 그에게 다가간 기자가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병사는 몹시 지친 표정과 충혈된 눈으로 기자를 흘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내일이오."

그렇습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전우가 어느새 쓰러져 죽어가게 하는 전쟁, 자신은 지금 살아 있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애인, 또는 아내와 아이들, 그들이 너무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 내일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을 겁니다. 그래서 가장 절실한 게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일이오’라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간절한 소망이 ‘내일’이라면, 우리는 그 ‘내일’을 어떻게 해야 맞이할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의 고난과 역경과 불편함을 ‘버텨내야’만 가능할 겁니다. 아무리 애써도 아직 한 줄기 빛을 찾지 못할 때는 그저 버티는 것밖에는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불편함과 아픔을 두 손에 쥐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담고서 버티고 또 버티는 겁니다. 버티는 것이 다가올 희망찬 내일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인 셈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팠던 이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가 훗날 우리의 후세들이 겪게 될 또 다른 아픔을 치유해줄 놀라운 도구가 돼 줄 겁니다. 이것이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우리가 온갖 고통과 불편함을 ‘버티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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