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청명한 봄 하늘을 보니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 생각난다. 그리고 시의 구절처럼 그리운 얼굴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갖가지 사연과 추억을 함께 한 사람들. 그들을 생각할 때면 미소가 번지기도,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기도, 때로는 한쪽 가슴이 시리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그리워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은 나 자신도 어떤 이에겐 추억할 얼굴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타인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으로 각인돼 있을까? 이왕이면 기분 좋은 사람, 웃음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길 바란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제니의 초상’도 그리운 얼굴에 관한 작품이다. 국내에는 1954년 한국전쟁 이후 개봉된 기록이 남아 있는 작품으로, 당시 관객들에겐 현실의 상처를 잠시나마 달래 준 추억의 고전 영화다. 

가난한 무명 화가 이벤은 당장의 먹을 것과 방세를 내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 했다. 그러나 화랑의 반응은 한결같이 차가웠다. 그러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갤러리에서 그림 한 점을 팔 수 있었다. 이벤의 화풍을 본 미술상은 풍경화가 아닌 인물화를 그려 볼 것을 조언하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는 제니라는 소녀를 만난다.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제니는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소원 빌기 놀이라면서 자신이 자랄 때까지 아저씨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소망을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이후 이벤은 몇 차례 더 우연히 제니와 마주친다. 그때마다 제니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빠르게 성장해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소녀에서 청소년, 여인으로 성장한 제니는 이벤에게 창작의 원동력이 됐다.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제니를 그리워하며 화가는 여인의 얼굴을 그렸다. 신비한 푸른 눈과 아련한 분위기가 감도는 제니의 모습은 스케치만으로도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제니 덕에 예술적 영감을 얻고 화가로서의 입지도 다져 가던 그는 태풍이 몰아치는 위험한 바닷가에서 그녀와 재회한다. 거센 폭풍우를 피해 대피하던 중 제니는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그 후 이벤은 두 번 다시 제니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리워하며 완성한 제니의 초상화는 유명 갤러리에 전시돼 수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제니의 초상’은 미국에서 1948년 개봉돼 판타지 멜로드라마의 기원이 된 작품이다. 영화는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신비로움을 전달하기 위해 정확한 나이조차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인 제니를 내세운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랑의 형상인 동시에 창작의 영감이기도 하다. 

영화 ‘제니의 초상’은 우리 마음에 내재한 순수한 사랑에 대한 동경을 그린 작품인 만큼 제니의 분위기가 몰입의 핵심이다. 특히 몇 개월 사이에 성장하는 얼굴의 일관성이 중요 과제였다. 제니 역의 제니퍼 존스는 서른이란 나이에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오래도록 기억될 순수하고 그리운 제니의 초상화처럼 아름답게 추억할 우리의 모습을 위해 나와 주변을 사랑하며 한 번 더 웃는 오늘을 살아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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