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당선을 축하하네. 입술이 바싹바싹 타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걷기 힘들어하면서도 골목골목을 누빈 선거유세의 험난했던 여정이 이제는 영광스러운 추억이 되었구려.
우리가 지난 시절 간간이 만나 소주잔 기울이며 시대의 아픔을 말하면서 하류 정치를 질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이제 그 정치의 얼룩진 현장에 자네가 섰네. 우리가 질타하던 그 사람들도 지금의 자네처럼 처음 입성했을 때는 맑은 정신을 갖고 있었을 걸세. 그러나 입성만 하면 그렇게 품격 있던 사람들이 왜 그리도 거친 언행이 나오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네.
자네, TV에서 많이 보았을 걸세. 국회에서 고함지르고 삿대질하는 장면들 말일세. 왜 이럴 수밖에 없을까? 국민을 위한다며 출마했지만, 4년 동안 그 초심을 잃은 탓은 아닐까? 통과되지 못해 산더미처럼 쌓인 법안들의 무게에 짓눌려 눈덩이처럼 커진 사회적 약자들의 피멍이 보이지 않는가?
꼭 기억할 게 있네. 그대들의 거친 언행과 다툼이 고스란히 국민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말일세. 자네들이 거칠수록 그것을 보는 국민 역시도 거칠어진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게. 그대들이 서로 편을 갈라 서로를 없애야 할 ‘적’으로 대할 때 국민도 편이 갈려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 말일세. 진앙지가 그대들이었음을 꼭 기억했으면 하네.
어느 책에 이런 글이 있더군. 나비와 벌과 파리가 자기 자랑을 하는데, 나비가 먼저 "나처럼 우아하게 날 수 있니?"라고 말하자, 벌은 "너희는 나처럼 빨리 날 수 있어?"라고 했네. 그러자 파리는 뭐라 했을까? "그럼 너희는 나처럼 똥 먹을 수 있니?"라고 말했더군.
이런 말다툼이 쓸모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걸세.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이 나라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십 년 전쯤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을 걸세. 선거를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중견 정치인과 식사를 하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술인들이었지. 그가 말문을 열 때는 "오늘 이 자리는 예술인 여러분의 고충을 듣고 싶어서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라고 했지. 그런데 정작 두 시간에 걸친 그 자리는 그 사람의 말로만 채워졌네. 자신이 그동안 어떤 법을 만들었고, 얼마나 어렵게 예산을 따왔다는 따위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찼지. 그곳에 모인 예술인들은 고욕이었을 거야. 자신의 애환을 전하려고 왔는데, 그의 자랑만을 들어야 했으니 말이야.
들어야 하네.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말을 말일세. 사람들은 말 많은 사람이 교만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네. 교만이란 자신을 남에게 부풀려 내보이는 태도를 말하지. 왜 이렇게 자신을 과장할까? 바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겠지. 이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 돼 있었던 걸세. 사실은 국민의 행복을 위한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이겨야’ 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당선돼야 했던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알아야 하네. 그러나 ‘이겨야 한다’는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면 이렇게 교만해질 수밖에 없을 걸세.
진정한 리더는 겸손한 리더일세. 「유머 화술」이란 책에 재밌는 우화가 있더군. 개와 고양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네. 개가 "우리 주인님이 나를 먹여주고, 사랑해 주고, 날 항상 챙겨주시는 것을 보면 주인님은 신(神)이 틀림없어"라고 하자, 고양이는 이렇게 말했네.
"주인이 날 먹여주고, 사랑해 주고, 날 항상 챙겨주는 걸 보면 나는 신(神)이 틀림없어."
어떤가? 사람들은 누구를 더 사랑할까? 처음 당선된 자네가 지금은 유권자인 국민을 신으로 여기겠지. 친구로서 부탁하네. 이제부터 4년 동안도 그런 초심을 잊지 말기를 말일세.
안도현 시인은 "속이 깊은 강일수록 흐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했네. 자네처럼 인품을 지닌 의원은 가볍지 않다는 말일세. 고함과 삿대질로 얼룩진 교만한 국회가 아니라, 조용히 토론하고 대안을 찾아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겸손한 국회가 되길 바라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네가 있기를 고대하겠네. 다시 한 번 당선을 축하하네. 그동안 고생 많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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