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정치 시민이 이끌어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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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류 정치 시민이 이끌어 가야 하나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역사소설가
  • 기호일보
  • 승인 2020.04.17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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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투표소 광경으로 시작한다. 수도 지역 선거에서 백지 투표가 70% 쏟아지고, 법에 따라 재선거를 치르는데 백지 투표 비율은 83%로 더 올라간다. 당황한 정부는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고 비밀정보부는 ‘주민 다수를 전염시킨 도덕적 감염병’의 원인을 조사한다.

백지 투표는 안 뽑겠다는 의미 이상으로 ‘뽑을 만한 인물이 없다’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만일 투표용지 끝머리에 ‘지지할 만한 인물이나 정당이 없음’이라는 항목이 있다면 바로 그곳에 기표했을 민심이다. 권력을 도둑질하거나 구걸하려는 자들에 대한 응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선거에서는 이런 표현처럼 "정치가들은 백지표(뽑을 대상이 없음)보다는 기권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권표는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다. 코로나19처럼 감염병이 돌아서 투표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고, 각자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백지표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것이라는 점을 믿는다"는 사마라구의 지적이 아니라도 가장 민주적인 선거라면 투표용지 말미에 ‘지지 후보가 없음’ 또는 ‘지지 정당이 없음’이란 기표란이 있는 게 정상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특히 이번 4·15 총선의 비례정당 투표용지를 받아본 유권자라면 어느 정도 이해해주거나 동조해 줄 것으로 믿는다. 원래 연동형비례제는 거대 양당의 독식 방지는 물론 다양한 민심 반영, 무엇보다도 국정에 참여시킬 가치를 가진 소수 집단의 의사가 반영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과는 꼼수에다 온갖 거짓과 탈법이 난무했다. ‘애초 선관위가 위성 비례정당을 허용해서 질서를 혼탁하게 만들었다’고 선관위 탓을 했던 여당은 입장을 뒤집어 위성정당을 만들고 선거 기호인 ‘1’과 ‘5’를 합성하는 꼼수, 탈법을 버젓이 저질렀고, 통합당은 ‘의원 꿔주기’를 벌여 수십 억 원의 정당보조금까지 꿀꺽 삼켰다. 선거제도를 엿장수 뭐 하듯이 여야가 해먹은 것이다. 세상천지에 이런 꼼수, 이런 해괴한 괴뢰정당이 있을까? 이게 민주적인 방식인가?   

얼마 전, 물론 대한민국 선거사에서 투표율이 22.3%가 된 재보궐선거가 있었다. 당선자가 60%를 얻었다. 득표율로 보면 굉장히 높은 수치이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유권자의 15% 지지도 얻지 못했다. 지역민의 85% 뜻은 전혀 반영되지 못한 셈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나 정당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는 이 현실적인 문제를 개선하려는 정치세력은 단연코 없다. 기권은 권리를 자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해 국민의사에 반영하지 않는 걸 마치 공직선거법의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권력 도둑과 정치 지도자들이 득시글거리기 때문이다. 물론 투표율이 낮으면 무효를 규정한 입법도 있다. 현행 주민투표법은 투표율이 ⅓에 이르지 못하면 아예 개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과 달리 이 규정은 권력이나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 뿐이다. 

21대 국회가 출범하면 희망이 생길까? 물론 그런 기대가 있으나 검증되지 않은 ‘불량품’들이 역대 어느 선거보다 높다는 것이 중론이고, 유권자들이 투표 행위로 정치 엘리트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정언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위기 포착에 능한 포퓰리스트들이 얼마만큼 걸러졌으면 하는 바람뿐인 걸 어쩌랴. 

2천400년 전 플라톤은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이해하기 쉽도록 각색(?)한 말이 요즘 언론에 떠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말이다. 어찌하랴. 최악을 빼고 차악(次惡)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결국 이번 선거도 국회의원 해보겠다는 잘난 인물들이 아니라 이 나라 유권자들이 시험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3류 정치를 우리 시민들이 끌고 갈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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