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인천 개항 후, 개항장에는 일본, 청국 거류지와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각국거류지가 형성됐는데 여기서 생활했던 외국인의 주택, 사무실 등 공간의 흔적은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또 다른 인물의 삶이 더해져 우리에게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교회와 학교가 들어서 교육의 터전이 된 송학동 2가 일원에는 120여 년 전, 최초의 경인철도 부설과 운산 금광개발의 주역이었던 모스(Morse), 최초 해외 이민인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던 데쉴러(Deshler) 등 외국인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또, 일제강점기 질곡과 광복 후 시대의 풍랑을 몸소 겪었던 입지전적 인물, 곽상훈(郭尙勳)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기록을 보면, 데쉴러 주택은 여러 채의 일본식 집과 한 채의 단층 양관, 그리고 넓은 일본식 정원을 지닌 대저택이었고 동시에 운산금광 채광사업을 진행했던 동양합동광업회사(東洋合同鑛業會社) 본사 건물이기도 했다. 이 주택 아래에 위치한 모스 저택도 아담한 2층 벽돌 양관으로 수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으로 알려졌다. 당시 데쉴러, 모스, 타운센드 등 미국인 사업자들은 주한미국공사 알렌의 후원 아래 인천을 무대로 경인철도 부설, 운산 금광채굴, 무역사업 등에 있어서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880년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들은 조선의 경제적 이권, 특히 ‘금광’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개항 이후 가장 먼저 금광으로 개발돼 주목을 받은 광산은 평안북도의 운산금광으로 이권(利權) 침탈이라는 의미에서 제국주의 국가와 체결된 최초의 광산이기도 했다. 운산금광 운영권은 알렌의 주선으로 1895년 7월 모스에게 넘어갔다. 당시 모스가 설립한 조선개광회사(朝鮮開鑛會社)는 운산군 전체 지역의 광산을 채굴하고 금만이 아니라 다른 광물도 채굴할 수 있으며 채굴 기한은 25년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모스는 운산금광을 채굴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권리를 양도받은 헌트( Hunt)와 파셋(Fasset)은 1897년 9월 29일 영국 자본까지 끌어들여 자본금 500만 달러에 이르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해 1938년까지 채굴했다. 이 회사의 조선 내 본사가 초기 송학동 2가에 자리했던 것은 모스와 데쉴러가 진행했던 철도 및 이민 사업과의 연계성 때문이었다. 1905년 이민사업이 중단되고 재정 책임자 데쉴러가 조선을 떠나자 동양합동광업회사도 옮겨가고 이 주택은 일본식 고급 요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서 짐작 할 수 있다. 

한편, 모스 저택도 이후 일본인 사업가, 경성일보 인천지국장 등이 거주했는데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다가 1954년 복구해 곽상훈(1896~1980)이 거주했다. 곽상훈은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태어난 곳은 부산이었지만 청장년기 이후 대부분을 인천에서 보냈다. 1917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올라와 미곡상을 운영하던 형 집에 머물면서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통학했다. 이때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20년에는 인천의 첫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만들고 단장을 맡기도 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만큼 그의 삶도 변화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주도해 투옥되는 등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방향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이후 5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5·16 이후는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당시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비판을 받기도 했다. 120여 년 전 역사적 사실과 인물, 건축물 등은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비록 ‘터’로 남아 전해지지만 인천 근현대사의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그것이 역사문화콘텐츠가 되고 도시의 이력이 된다. 인천이 역사적으로 어떤 공간이었는지 새삼 그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