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근대 시민사회는 ‘산업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치와 여가’ 증대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소수의 귀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급되던 재화가 일반 서민들에게도 돌아가면서 그들에게도 비로소 소극적이나마 사치의 기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사치 욕구는 여가의 증대와 함께 근로 의욕으로 이어져 내수 활성화에 기여하며 이로 인한 소비 증가는 유통의 발달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된다. 일반 민중들도 귀족을 꿈꾸며 그 세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대중적 귀족의 출현을 인정하고 그 등장을 수용하는 사회는 빠르게 경제발전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절제를 강요하고 검약을 요구하는 사회는 세금으로 모든 국민들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정권의 허무맹랑한 언사와 행태로 불거지는 결과만큼 불가피하게 경제 침체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옛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붕괴와 체제 와해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적절한 고용 창출을 수반하는 귀족적이고 사치스러운 소비가 허용되고 가능해야 일반 대중들도 땀 흘려 일하고자 하며 그런 근로 의욕이 경제성장의 토대가 된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할 정도로 그 권능이 대단한 존재이지만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전염병이다. 그런데 온 세계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놓고 있는 이 치명적인 질병보다 더 위세가 센 것이 있는데 명품이 바로 그것이다. 

소비가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한국 사회에서 명품에 대한 소비 욕구는 지칠 줄 모른다. 한때 역병이 돌면 무당이나 점집을 찾아 그 두려움을 회피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에서도 중국 폐렴으로 1만여 명이 감염되고 수백 명의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정에 아랑곳 없이 프라다를 입는 것이 악마인지는 모르지만 백화점의 샤넬, 구찌, 루이비통 매장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감염병 사태로 백화점 내점객이 급감한 올해 현대·롯데·신세계 백화점 3사의 매출이 모두 감소했지만 이들 백화점의 명품관은 오히려 매출이 지난해보다 증가 추세다. 돈을 이기는 바이러스가 명품 앞에 무릎을 꿇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핸드백 가격을 올려도, 달리던 자동차에서 빈번하게 원인 미상의 화재가 발생해도 명품백과 외제 승용차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충성심에는 별반 변화가 없어 보인다.   

사치는 꾸미는 행위이고 명품은 그 연출의 중요한 소품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장인이 만드는 구두나, 옷, 넥타이, 벨트, 화장품 등이 고가의 명품 반열에 오르려면 오래 사용할수록 품격이 돋보여야 하고 희소성으로 인해서 그 존재가 주목받아야 한다. 기실 대부분의 명품들은 주로 돈밖에 없는 사람이나 남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자기 위장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간혹 명품이 돼지 목에 걸린 진주로 전락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 사치를 향유하고 명품을 소유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고 권리이다. 분수에 넘치는 사치로 비롯되는 부작용 또한 본인의 몫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유층뿐만 아니라 전계층의 명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의 한 결과라는 혐의를 짙게 풍긴다. 명품이 그 주인에게 만족과 충족감을 선사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보장한다면 그러한 사치품은 문제 될 것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명품에 대한 소유 욕구가 남의 이목에 대한 과도한 과시욕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이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한국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분노와 증오로 치닫는 이념적 갈등과 경제적 요인 이외에 행복하지 못하고 재미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틈새에 자리 잡은 허영심과 자기 과장의 공간은 명품과 사치품의 차지가 돼 가는 중이다. 가식은 겉멋을 먹고 자라고 성장한다. 형식과 겉모습에 취해 내실과 실속을 외면하는 세태가 만연할수록 거리낌 없이 명품은 훨씬 더 추앙받고 위선은 한층 더 번성하며 허위의식은 더욱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독서율이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에 속하는 가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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