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최고의 통치 기구가 세워지면서 체신부가 탄생했다. 이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체신의 날’ 제정 이야기가 오고 갔고,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한 날을 기념일로 하자는 데 모두 공감했다. 문제는 신식 우편제도가 실시된 날짜를 언제로 정하느냐였고 양력이냐 음력이냐도 관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제시됐던 내용이 개항 당시의 우편과 전보 담당기관인 우정사(郵程司) 설치일(1882·12·4, 양력 1883·1·12), 고종의 우정총국 개설 칙령일(1884·3·27, 양력 4·22), 우정총국이 우편 업무를 시작한 날(1884·10·1, 양력 11·18), 우정총국 청사 준공식 축하연 날(1884·10·17, 양력 12·4) 등으로 다양한 의견이 분분했다. 단지 통신의 뿌리가 우편(편지)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논의는 1956년 "체신사업은 문명개화의 선구로서 사회 첨단에서 활동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갑신정변으로 널리 알려진 우정총국 청사 준공식을 거행한 양력 12월 4일이 기념일로 타당하다"라는 논지로 결정돼 이해부터 ‘체신의 날’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그러다가 "12월 4일은 갑신정변이 발발한 날로 이로 인해 우편사업이 중단된 ‘제삿날’이므로 우정총국이 실제로 개국한 날을 기념일로 해야 한다"는 개정 문제가 제기됐다. 1972년 7월에 이르러 "고종의 우정총국 개설 칙령일이 근대적 체신사업 창시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결론을 내려 새롭게 기념일을 4월 22일로 개정했다. 그날은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파견됐던 홍영식(洪英植) 등이 개혁 과제로서 신식우편제도 도입을 건의함에 따라 고종이 우정총국(郵征總局)을 개설하라는 칙명을 내린 날이었다. 

이후 1995년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개편되면서 ‘체신의 날’ 명칭도 ‘정보통신의 날’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정부가 본격적인 통신제도 필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개화정책 일환으로 사절단 및 유학생의 파견에서 비롯됐고, 조선 정부의 자주적인 노력은 계속됐으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채 조선의 통신체계는 일본과 청에 의해 주도됐다. 1882년 임오군란을 전후해서 통신의 중요성을 먼저 깨달은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는 수단과 방법의 하나로 1883년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에 의뢰해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선 선로를 설치하고, 부산에 일본전신국을 개설함으로써 한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보낸 전신이 부산에 접수되고 배편을 이용해 제물포에 도착한 후 이를 한성으로 보내는 데에는 1주일에서 2주일이 소요됐다. 이에 맞서 청국은 1885년 7월 조청(朝淸)전선조약을 맺고 자국의 기술자 120여 명과 자재를 천진에서 싣고 와, 8월 19일 인천을 기점으로 부평-양화진-한성을 잇는 경인전선을 준공했다. 다음 날 8월 20일 개통식과 함께 전기통신 역사가 시작됐으며 청국이사청 내에 한성전보총국(華電局)과 인천의 분국을 개국했다. 이어 10월 8일 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에서 청나라 전신선과 연결하는 서로(西路)전선을 완공했다. 

일본 또한 1888년 한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남로(南路)전선을 완성했는데 양국 모두 조선의 정치·외교·군사·경제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전신시설 가설이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의 전신선은 만주와 러시아로 연결돼 유럽과 아시아의 전신선을 완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약소국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04~5년 러일전쟁기에 이르러 조선의 통신 주권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130여 년 전 우편, 전신 등으로 시작했던 정보전달 방식이 오늘날에는 이메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유튜브 등으로 변신했다. 신속 정확한 정보 전달 및 수용은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큰 축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열강들과의 경쟁 속에서 어느덧 대한민국이 IT 최강국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보 통신 역사에서도 인천의 역할과 위상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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