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진건읍에 모셔진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1334~1390)장군은 원주변씨의 시조이다.

변안열의 집안은 원래 고려의 유민이지만 요동 심양에서 태어나 원나라 장수가 됐다. 왕자로 원나라에 있던 공민왕(恭愍王·1330~1374)이 변안열의 능력을 인정해 노국공주(魯國公主·미상~1365)와 고려로 돌아올 때 수행하는 장수로 동행하게 했다.

변안열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로 귀화해 무인으로서 무공을 쌓고 이름을 날렸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막는 데 활약했고, 이듬해 다시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몰고 침략해 개성이 함락됐을 때 고려가 반격해 개성을 다시 수복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일등 공신이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강화도 앞에 침입한 왜구를 막아냈다. 

변안열의 상. 국방부 ‘2014년 호국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변안열의 상. 국방부 ‘2014년 호국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구하고

1380년(우왕 6)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함께 고려에 침입해 큰 피해를 입힌 왜적을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우왕(禑王·재위 1374∼1388)은 변안열과 이성계에게 상으로 황금을 내렸지만 변안열은 "적을 막는 것이 장수의 당연한 일이지 상을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상을 받지 않았다. 이는 무인으로서의 변안열의 기계와 심지를 보여 주는 일화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수없이 회자됐다.

남북으로 외적의 침입이 많아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던 고려 말, 변안열과 이성계는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장수로 명성을 떨쳤다. 개혁적 성향도 같았다. 두 사람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전우이자 동지로 서로를 의지하며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서로 믿던 두 사람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이성계는 회군 이후 혁명세력과 함께 신왕조 창건 의도를 분명히 했다. 고려의 신하로 남은 변안열과는 당연히 멀어졌다.

변안열 역시 정치적 개혁의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는 끝까지 반대(反對)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혁명세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변안열이 부담스러웠고,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병권을 갖고 있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막역했던 사이였고, 변안열은 힘을 모아 함께 국난을 극복하며 서로를 인정한 관계였다. 

# ‘불굴가’ 짓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이성계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이 모함을 받는다면 언제든지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 줄 인물이지만, 국운에 관계되면 지조를 버리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았다.

먼저 이방원(李芳遠·1367~1422)은 변안열과 정몽주를 회유했다. 학식이 높으면서 병권을 쥐고 있던 정몽주와 충절이 높고 무예에 뛰어나며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던 변안열을 포섭 혹은 제거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此亦何如

저런들 어떠하리 彼亦何如 

성황당 뒷담이 城隍堂後垣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하여 我輩若此爲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不死亦何如

-「해동악부(海東樂府)」(심광세), ‘하여가’(이방원 작)

이방원은 두 사람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하여가’를 지어 새로운 조정에 함께 하자는 뜻을 전했다. 이를 듣고 난 정몽주와 변안열은 각각 ‘단심가(丹心歌)’와 ‘불굴가(不屈歌)’로 화답했다. 이 시문에는 고려에 대한 끝없는 충절과 자신들의 의지를 표출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 죽어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 寧有改理也歟

-「해동악부(海東樂府)」(심광세), ‘단심가(丹心歌)’(정몽주 작)

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한다는 자신의 일편단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굳은 의지를 표현했다. 그가 보여 준 죽음의 논리는 불의한 세력과의 비타협 정신을 보여 줬다.

변안열 또한 자신의 뜻을 시로 전했다. 

<절의를 굽히지 않으리>

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꿰어매어 

앞뒤로 끌고 당겨 이 한몸 가루가 된들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변안열, 「청구영언(靑丘永言)」, ‘불굴가’(국문 가사) 중에서- 

<불굴(不屈)의 노래>

내 가슴에 말만한 구멍을 둥그렇게 뚫어 穴吾之胸洞如斗

새끼줄로 길고 길게 꿰어서 貫以藁索長又長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끌어 갈리고 두들겨지네 前牽後引磨且알

네가 하는 짓을 내가 마다할 수 없지만 任汝之爲吾不辭

만약 내게서 임금을 빼앗으려 하면 有欲奪吾主

이 일은 내가 굽힐 수 없다 此事吾不屈

-(변안열, 「대은실기(大隱實記)」, ‘불굴가’(한시) 중에서- 

변안열의 ‘불굴가’는 정몽주의 단심가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불굴가는 변안열 사후 민간에 오랜 세월 구전돼 오다 조선후기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한역(漢譯)한 시가 「대은실기(大隱實記)」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조선후기에야 비로소 문헌으로 정리될 만큼 철저히 배척받았다는 의미다.

변안열은 불굴가를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어떤 힘으로도 굽힐 수 없음을 밝혔다. 가슴에 크게 구멍을 뚫고 줄로 묶어서 이리 끌고 저리 끌어가서 얼굴도 뭉개지고 갈려지는 고통 속에 만행을 저지르는 불의한 세력들에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변안열은 1389년(창왕 1년)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우왕 복위를 모의한 일에 연루돼 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 등과 함께 유배됐다가 처형됐다. 변안열의 지절을 확인한 이성계가 공양왕(恭諒王·1345~1394)을 협박해 반역의 누명을 씌운 탓이다.

이성계는 가산을 몰수한 뒤 한양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 사살했다.

# 대를 이은 무공과 충정 

변안열의 후손은 국난의 시기에 혁혁한 공로를 쌓았다. 변협(邊協·1528~1590)장군과 변응성(邊應星·1552~1616)장군 두 부자가 변안열의 후손이다.

특히 변협은 선조대 활약했던 무신으로 율곡 이이의 제자이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 산학(算學)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임종에 앞서 "10년이 못 돼 국가가 군란에 시달릴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변란에 대비할 것을 주문, 신립 장군과 대비돼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변안열은 현재 남양주시 진건읍에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공을 기려 변안열을 ‘2014년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남양주시 역시 우직함과 올곧음을 상징하는 변안열 장군의 공을 기리는 문화제를 매년 열고 있다.

작은 이익에도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마음에 변안열이 주는 메시지는 무언지 생각해 볼 만하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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