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봄 내음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운동 삼아 동네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연초록 새싹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제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가 떠올라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때는 정의롭게 행동했다고 믿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만했던 겁니다. 비로소 지금에서야, 그때 저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교만은 나를 부풀려서 드러내는 겁니다. ‘왜 그렇게 나를 과장해서 포장했을까?’라는 생각이 산책하는 내내 제 머리를 채웠습니다.

「현자들의 철학 우화」에 단체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옵니다.

"저는 작은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매출액이라고 해야 몇 억 안 됩니다."

"저는 관청의 국장입니다. 공무원 생활이라고 해야 뻔한 거 아닙니까?"

말끝을 겸손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그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맨 구석에 앉은 사람이 "저는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럼, 운수회사를 경영하시는군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월급쟁이 운전기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들은 운전기사만 빼놓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시간이 흘러 식사가 끝났는데도 차가 출발할 기미가 없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버스 운전기사를 찾았습니다. 그때 맨 구석에 앉아 있던 그 운전기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 찾을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운전하고 싶지 않군요."

두 사람의 자기 소개를 볼까요. 첫 문장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뒷 문장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만을 말한 기사는 그들의 교만을 읽어내고는 속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버스 운행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화이긴 해도 생각해 볼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위의 두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았거든요.

「마음을 움직이는 인성 이야기 111가지」라는 책에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라는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위대한 행동이란 건 없습니다. 위대한 사랑으로 행한 작은 행동들이 있을 뿐입니다. 교만은 모든 걸 파괴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일 뿐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에 제 머리가 저절로 떨궈졌습니다. 이 책에는 노자가 임종을 앞둔 스승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르침을 달라는 제자의 간청에 스승은 "내 혀가 있느냐?"고 물었고, 노자는 ‘있다’고 답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내 이는 있느냐?"라고 묻자, 노자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명쾌했습니다. 이는 단단합니다. 좀처럼 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혀는 부드러워서 숙일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는 ‘교만’의 상징이고, 혀는 ‘겸손’의 상징이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이 책을 쓴 박민호 선생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을 ‘하심(下心)’, 즉 ‘마음을 내려놓는다’라고 하고, 도교에서는 ‘겸하(謙下)’라고 하며, 기독교에서는 ‘섬김’이라고 한다."

오늘 저는 1시간여의 산책길이 온통 부끄러움과 함께 그동안 저를 알고 지내신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몽당연필처럼 살고 싶다는 다짐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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