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요즘 TV 프로그램의 대세는 단연코 ‘먹방’이라고 할 만하다. 먹방은 먹는다는 뜻의 ‘먹’과 방송의 ‘방’이 합쳐진 신조어이다. 2009년 ‘아프리카TV’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먹방은 이제 케이블 채널은 물론이고 지상파에서도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소개되는 음식 대부분이 퓨전 요리로 ‘단짠단짠’을 트렌드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도 꿋꿋하게 추억 속 서민들의 토속밥상을 소개하는 프로가 ‘한국인의 밥상’이다. 이 프로를 시청하다 보면 10여 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가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맛과 냄새로 환기되는 기억들이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만들곤 한다.

얼마 전 이세기 시인은 제3시집 「서쪽이 빛난다」(실천문학사, 2020)를 발간했다. 2010년 「언 손」(창비)을 발간했으니 10년 동안 고이 묵혀뒀던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제1시집 「먹염바다」(실천문학사, 2005)에서부터 「서쪽이 빛난다」까지 이세기 시인의 시에는 오래 묵힌 장맛처럼 갯내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하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함께하고 있다.

강화도 읍내 밥집 아리랑집엔 / 특별한 차림표가 있다 // 새우두부젓국 // 염하에서 잡아온 새우에 두부와 무를 설컹설컹 썰어 / 젓으로 간을 하여 탕으로 끓여 내온 국엔 // 내 아버지의 입 냄새가 난다 // 갯물을 닮은 짐짐한 맛에는 / 섬그늘이 바다에 그리매가 되어 어리는 날도 있어 / 그런 날과 겹치는 어느 해거름 저녁 / 숟가락으로 새우두부젓국을 떠먹을 때면 // 섬으로 들어와 살았다는 / 가계가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 아버지의 입 냄새가 왜 그렇게 생각나는지 // 새우두부젓국을 먹을 때면 / 보름사리 보고 동지나해에서 들어온 / 산돼지 털을 닮은 턱수염과 / 장딴지만 한 두툼한 그물코를 꿰던 손이 생각나고 // 평생 배를 타다 물고기 눈처럼 / 두 눈을 뜨고 죽은 아버지가 생각날 때가 있다(「새우두부젓국」 전문)

인천은 새우젓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6월 소래포구의 새우젓, 연안부두 젓갈시장의 드럼통 속 새우젓, 그리고 추석날 갓 잡아온 새우를 사려고 어머니와 찾아가곤 하던 북성포구의 선상 파시 등이 비린내와 함께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외에도 강화도 새우젓축제는 인천의 명물축제 중 하나이다. 이처럼 새우젓이 풍부한 것은 인천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할 것이다. 

분단의 현장인 강화도에는 ‘염하’가 있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서로 만나 서해에서 서로의 몸을 섞는 곳, 그곳이 바로 염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부터 황금어장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근처 바다에는 많은 어종들이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 분단으로 지금은 바라볼 수만 있을 뿐  다가설 수는 없는 곳들이 많다. 그 분단의 장소에서 이세기 시인은 강화도 토속음식 새우두부젓국을 떠먹으며 추억 속 아버지의 내음을 맡고 있다. 어떠한 기교도 들어가 있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묵직한 맛이 아버지를 닮았다. ‘섬그늘이 바다의 그리매’가 되어 남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서해의 섬들이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5도와 강화군도, 그리고 덕적군도까지 인천의 섬에는 각자의 상처를 보듬고 있으면서도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움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불현듯 우리 곁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작고하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17살 어린 나이에 홀로 피란을 나오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찌개가 바로 새우젓두부찌개였다. 쌀뜨물에 호박과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두부를 듬성듬성 잘라 새우젓으로 간을 한 찌개. 아버지는 반주로 소주를 한 잔을 마시고, 찌개를 한 숟갈 크게 뜨시고는 맛있게 잡수셨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새우젓두부찌개가 정말로 싫었다. 쿰쿰한 냄새는 물론이고 찝찔하기만 한 것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이 새우젓두부찌개가 생각나곤 한다. 5월 8일에는 새우젓두부찌개를 끓여놓고 사진 속 아버지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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