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사랑한 지식인, 계급의 벽 맞서 ‘차별 철폐’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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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사랑한 지식인, 계급의 벽 맞서 ‘차별 철폐’ 외치다
6. 조선의 흙수저 신분 운동을 이끈 ‘현일’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5.12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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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별내동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장소로 유명하다.

별내동은 과거 ‘샛말’ 또는 ‘화접리(花蝶里)’라고 일컬어진, 꽃과 나비가 많은 아름다운 동네였다. 현재는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옛 자취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화접초등학교가 있어 옛 지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화접리는 조선 중기 이후 천녕 현씨 집성촌이었다. 현수겸(玄壽謙, 1513~1585)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구한말까지 중인(中人) 역관(譯官·현재의 통역관)을 많이 배출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여항문학의 대가 현기(玄錡, 1809~1860)와 현일(玄鎰, 1807~1876)이다. 

현기는 정수동(鄭壽銅)과 함께 시사(詩社)를 결성해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당대 저명한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신(詩神)으로 불린 여항시인(閭巷詩人)이다. 

현일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해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중인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신분운동을 펼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에 도전한 그를 만나 본다.

왼쪽부터 1851년 전개된 중인 신분 운동의 전말이 기록된 ‘상원과방’. 중인 신분 통청 운동에서 현일이 제술유사로 활동한 기록. 정약용의 제자 이청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현일의 애도시. ‘교정시집’으로 현일은 5권의 시집을 남겼다.
왼쪽부터 1851년 전개된 중인 신분 운동의 전말이 기록된 ‘상원과방’. 중인 신분 통청 운동에서 현일이 제술유사로 활동한 기록. 정약용의 제자 이청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현일의 애도시. ‘교정시집’으로 현일은 5권의 시집을 남겼다.

# ‘매치(梅痴)’와 ‘간자벽(看字癖)’에 빠져 

현일(玄鎰)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중인의 신분 문제에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는 1807년(순조 7년)에 태어나 21세에 잡과 장원을 차지한 이후 교회(敎誨), 교수(敎授) 등을 거쳐 연천현감(漣川縣監)까지 지냈다. 평소 진부하지 않은 신시(新詩, 새롭고 참신한 시)를 중시했다. 

188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가족을 이끌고 선영이 있는 양주(楊州) 추곡(楸谷, 지금의 별내동 지역)으로 내려와 오류헌(梧柳軒)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매화를 매우 좋아해 많이 심어 ‘매치(梅痴, 매화에 미친 사람)’ 또는 ‘매객(梅客)’이라고 일컬어졌다. 현일이 두릉(현재의 남양주 능내리)의 정약용과 그 제자 이청, 서유구 등 남양주 실학자와 교유한 것도 이 무렵으로 알려진다.

현일은 ‘사람의 마음이 곧 천도(天道)’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고, 우리도 군자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자주의식이 투철한 지식인이었다. 문자를 늘 가까이 하는 ‘간자벽(看字癖, 책벌레)’이 있었는데, 문장이 국가의 위상을 높인다는 생각과 학문의 중요성을 깨달은 데서 얻은 것이다.

그의 문학이 ‘북학(北學, 중국의 문명을 배운다는 의미)을 말하면서 남의 것을 모의하는 시인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홍현보, 「교정선생유집」 서문 참조)

# 조선의 흙수저, 중인의 아픔을 안고

우리가 현일을 주목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자기계층의 신분 문제에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한 중인이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신분 문제의 해결법을 찾는다는 건 쉽지도 않을 뿐더러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중인 출신은 아무리 뛰어나도 각기 재능에 맞게 지위를 얻고 직분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뜻을 펴지 못해 술독에 빠져 살거나 이름을 감추고 세속과 등지고 울분에 차서 자포자기한 사람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인, 암울한 상황이었다.(장지완, 「침우당집」 중에서)

어부, 나무꾼, 백정, 장사치야 무지하고 배운 것이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중인들은 학문과 재능이 있지만 남의 종이 돼 사는 것과 같았다. 양반과 천민 사이에 처한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한탄한다.(변종운, 「소재집」 중에서) 

차좌일(車佐一, 1556~1615) 같은 시인도 정약용, 홍양호 등 당대 명사에게 인정받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음을 알고 ‘영원토록 이 나라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현일, 방휴선 등을 주축으로 1851년 중인 신분운동이 전개됐다. 현일은 학식과 문장력을 인정받아 제술유사(製述有司)로서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들은 중인의 차별대우를 철폐하고 과거에 응시해 문과에 합격하면 승문원(承文院)을, 무과에 합격하면 선전청(宣傳廳)에 임용시켜 줄 것을 주장했다. 낮은 관직의 문호를 열어 달라는 요구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현일 등이 전개한 이 신분운동은 외부로부터의 변화를 수용하고, 전통사회가 지닌 문제를 자신의 주체적 활동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왼쪽부터 김석준 교정으로 간행된 현기의 시집 ‘희암시략’. 조선시대 일본어 통역 교재로 쓰이던 ‘왜어유해’. 한자, 일본어 발음과 뜻이 한글로 함께 기록돼 있다. 홍순명이 짓고 현계근이 수정·보완했으며, 두 사람 모두 남양주 역사 인물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김석준 교정으로 간행된 현기의 시집 ‘희암시략’. 조선시대 일본어 통역 교재로 쓰이던 ‘왜어유해’. 한자, 일본어 발음과 뜻이 한글로 함께 기록돼 있다. 홍순명이 짓고 현계근이 수정·보완했으며, 두 사람 모두 남양주 역사 인물이기도 하다.

# 문명 개화와 민족운동에 앞장서

현일 이후 천녕 현씨들은 자기 의식을 고양시키고 자기 역할을 새롭게 찾아내어 확대해 나갔다. 1882년 「동문휘고(同文彙考)」를 편집·간행한 현제보(1835~?), 학부편집국에서 교과서 편찬사업에 종사하고 한국인의 애국열을 고취하며 「동국사략」과 「유년필독」 등을 출판하며 민족 계몽에 앞장섰던 현채(玄采) 등이다.

또 「신편가정학」, 「식물학」 등을 편찬하고 「미국독립사」를 번역 소개하며 학문을 통해 자립하는 의지와 자립할 수 있는 행동이 생긴다며 민족 계몽에 앞장선 현은(玄隱), 독립정부를 세우고 민족자결의식 고취에 힘쓰고 임시정부 장관을 지낸 현순(玄楯) 등 대를 이어 큰 인물을 배출했다.

나도향 등과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고 언론인으로 재직하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했던 현진건(玄鎭健)도 빼놓을 수 없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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