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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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인생
황흥구 인천지방행동우회 부회장/수필가
  • 기호일보
  • 승인 2020.05.19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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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흥구 인천지방행동우회 부회장
황흥구 인천지방행동우회 부회장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던데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게 화근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할 때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도 됐다. 아내는 여행을 떠나기 전, 냉장고에는 무엇무엇이 들어 있고 음식물쓰레기는 봉투에 잘 넣어서 제때 버리고 가스불은 잘 잠갔는지 확인하고 나가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 번호키는 바꾼 지 얼마 안 됐으니 잊지 말라며 비밀번호까지 적어서 식탁 옆에 붙여 두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여행이나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서둘러 아침 일찍 출근했다. 그럭저럭 냉장고에 밑반찬 넉넉하지 혼자 지내는 것도 홀가분하고 잔소리도 듣지 않아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퇴근하고 들어오면 아내가 없는 집안은 적막하고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일찍 들어가 봐야 반기는 사람도 없고 나는 이때다 싶어 직원들과 회식하거나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은 친구들을 불러내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어제가 바로 그날이다. 친구들과 만나 저녁 먹으며 반주까진 좋았는데 집 앞 호프집에서 입가심 한다고 한잔 더한 것이 사달이 났다. 아무리 전날 과음을 해도 새벽이면 깨는 버릇이 있다. 일어나 반드시 신문을 다 읽고 출근한다. 이날도 속은 메스껍고 골은 지끈거려도 별 수 없이 일찍 일어나 신문을 보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 공기가 문틈으로 확 몰려와 술이 갑자기 깨는 듯했다. 다른 날 같으면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졌던 신문이 오늘 따라 문 뒤에 놓고 가서 문을 엶과 동시에 저만치 밀려 났다.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신문을 집으려다 그만 문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혀 버렸다. 신문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문고리를 연방 비틀었지만 문은 꼼짝 않고 있었다.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하필이면 그날 따라 과음해 속에서 열이나 팬티만 걸치고 나오지 않았던가, 아차 싶어 다시 문고리와 함께 부착된 문자판을 밀어 올리니 가지런히 아라비아 숫자가 나왔다. 아내가 일러준 비밀번호가 가물 가물거렸다. 식탁 벽에 붙은 냉장고 내용물 순서와 함께 그 옆에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간단한 네 자리 숫자, 마누라 생일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결혼기념일,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 아 잊으랴! 0625일까?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이리저리 눌러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 남짓 숫자판과 씨름을 했더니 지칠 대로 지치고 어언 현관 창문 사이로 훤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찬란한 햇빛에 비친 벌거벗은 몸뚱이가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문 옆의 조용하던 엘리베이터마저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제 출근하려고 옆 라인 1003호 집 아가씨도 나올 시간이 됐는데 무작정 이럴 수만은 없었다. 숨을 곳을 찾아보지만 맨발로 팬티 바람에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어 우선 계단 비상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직수굿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곰곰이 생각했다. 카드 한 장이면 아파트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문이 스르르 열리고 닫히고, 겨울이면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향해 리모컨을 누르면 자동으로 시동이 걸리고, 휴대전화 속에는 전화번호를 비롯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 세상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았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난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문명의 이기라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줘야 하는데 과연 나는 지금 행복한가? 지금처럼 내 집에 들어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 들어가고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니지 싶다. 어렴풋이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 밖 현관 앞에서 한바탕 떠드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경비 아저씨, 이쪽 계단에 웬 발가벗은 노숙인이 가지 않고 있어요, 끌어내든지 쫓아내든지 할 거 아녜요, 어디 무서워서 살겠어요…" 이때 비상문 문고리가 한 바퀴 돌아가는 순간 그 안에 있던 나도 동시에 문고리를 힘껏 부여잡고 매달렸다. "안 돼, 나는 노숙인이 아녜요…" 큰소리쳐 봤지만 차마 1004호 집 주인 누구라는 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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