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가족공원묘역을 찾았다. 고인들을 모시는 묘역이라 큰 도로변 입구에서부터 숙연해지는 곳이다. 모든 생물들 사람, 식물, 동물들은 최후의 호흡이 끝나고 죽음의 운명에 도달하는 그 순간부터 물질로서 세균의 작용과 화학적 변화로 부패 현상이 일어나 빠르게 또는 느리게 물질구조의 단위 되는 원자로 분해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매장한 유해에서는 세균작용과 화학반응도 받지 않고 부패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자연적 미라 형태로 발굴되는 일도 있다. 미라로 유명한 이집트에서 미라가 자주 발굴되는 것은 사막지대의 땅이 건조하고 금속성분의 흙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피라미드 왕가 무덤의 미라는 모두 인위적으로 죽은 사람의 옆구리 부분으로 내장을 꺼내고 그 속에 썩지 않는 수지와 아마포 등을 넣고 약품과 방부제로 처리해 생긴 것들이다.
인천 남동구, 서구, 부평구, 연수구 지역에서 미라가 발굴됐다. 장례를 존중하고 중요시했던 우리의 풍습에 따라 장례에 관한 옛 책들도 많이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 이심의 「정감록(유산록)」, 도선의 「밀기」, 이중환의 「택리지」 등은 모두 조선 개국 때 고려시대 제도를 본받은 책들이라고 한다. 1232년 인천 강화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고려의 상정예문 내용을 채택해 인용한 책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의 제례법은 고려 때 1372년 3월 고려 관공선을 타고 외교사절로 중국 명나라를 다녀온 정몽주가 주자가례와 우리의 전통 제례를 혼합해 제례법을 제정한 것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통례원, 대한제국에서는 장례원, 예식원을 설치해 나라의 제례예식 등을 주관해 왔다.
전통풍습이 뿌리 깊게 이어져오는 장례 중 화장으로 장례를 올리는 시민들이 많이 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땅 부족도 있지만 화장으로 장례하는 시민들이 많이 있다. 나라의 임금들도 화장을 선택했다. 고조선 때부터 있어 왔던 화장이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불교와 유교가 융흥했던 신라였다. 24대 진흥왕, 30대 문무왕, 51대 진성여왕, 52대 효공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화장으로 장례를 했으며 조선시대까지 대관들도 화장한 사람이 많았다. 불교의 전통식 장례도 화장으로만 올린다. 장례와 제례예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촛불, 등불, 장명등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안내하기도 했으며 영혼을 불러들이고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기능을 한다고 옛부터 전해오고 있다. 궁궐, 왕릉, 불교사찰, 사대부가 의정원에 있는 장명등과 초가의 처마 기둥에 내걸려 있는 등불은 장식품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고 영혼과 관련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가족공원 묘역에서는 몇 년째 시설물들을 새롭게 조성하는 사업이 계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기존 전통 분묘 모습을 살려가며 묘역의 시설물 조성사업을 하면서 묘역 곳곳에 우리의 전통풍습을 복원하는 차원으로 장명등을 설치해 고인들을 위로하는 모습도 있었으면 한다. 유골을 모시는 봉안건물도 늘어나고 있다. 봉안당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제례상을 차려놓고 예식을 올리는데 있어 제약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관계자가 꼼꼼하게 살펴 보완하는 일도 있어야 한다. 가족공원묘역터는 고려 때 불교사찰이 몇곳 있었던 곳이다. 대한제국 시절에는고종 임금의 능묘로 사용하려고 능사와 능참봉까지 두고 있었던 곳이다. 가족공원묘역터가 이른바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이든 아니든 고인들을 모시는 곳이 생활도심 가까이에 있어 시민들에게 고마운 곳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