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가끔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난 후에 그런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내 마음은 요동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알부자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는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가난뱅이가 술을 마시면 "저 사람, 술독에 돈을 쏟아붓는구먼"이라고 하고, 부자가 술을 마시면 "와, 저 사람은 풍류를 즐기는 법도 잘 아네"라고요. 가난뱅이가 허름한 주막에서 밥을 사 먹으면, "저 사람, 벌이도 없으면서 밥은 잘도 처먹는구먼"이라고 하고, 부자가 그곳에서 밥을 사 먹으면, "저 양반,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저렇게 허름한 곳에서 음식을 사 먹는 걸 보면 정말 사람이 소탈해"라고 한답니다. 가난뱅이가 다른 사람 말을 하면, "남의 일에 험담만 늘어놓다니"라고 하고, 부자가 그러면 "와, 그런 정보를 알려주다니 참 고마운 사람이네"라고 합니다. 가난뱅이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흥부처럼 그 많은 자식을 어찌 먹여 살리려 하느냐?"고 하지만, 부자가 많이 낳으면 "자녀를 많이 낳았으니 축복받을 겁니다"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두 마음이 모두 ‘내’ 마음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두고도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그 행위를 달리 판단하고 해석하는 태도가 모두 ‘내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행위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마음은 그가 ‘누구’인지를 먼저 떠올린 뒤에, 부자와 빈자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 사람의 ‘행위’를 해석해냅니다. 

그리고는 그 행위가 ‘옳다’와 ‘그르다’로 규정해버립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왜곡된 생각이 한두 사람을 거치면서 부풀려지고, 부풀려진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실’을 왜곡하게 하는 편견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요. 혹시 나의 신념이나 가치관, 즉 나의 기준으로 상대의 행위를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내 기준대로 세상을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 남들의 행위를 함부로 해석할 때가 문제입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여기며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옳고 그름으로 나누게 되니, ‘나’나 ‘그 사람’이나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어느 책에서 읽은 부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부부가 목장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넓은 풀밭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벅찼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그 사이에서 노니는 하얀 구름, 그리고 넓고 푸른 초원의 그 평화로움 속에 한적하게 노니는 양들의 모습은 마치 천국의 모습과도 같았을 겁니다. ‘어떤 예술가도 이처럼 완벽하게 그려낼 순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자 부인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무척 아름답지요? 초원을 노니는 양들을 보세요." 이 말에 남편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요, 참 아름답지요. 여태껏 내가 먹어본 요리 중에서 양고기가 최고였거든요." 평화로운 초원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양들을 한 사람은 ‘가슴’으로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혀’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우리 마음속에는 부부의 생각 중 누가 옳을까라는 호기심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기준대로 양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가슴으로 보든 혀로 보든 그것은 각자가 선택할 일입니다. 양을 먹이로 바라보든 아니든 그 선택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냥 그 사람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관계를 조화롭게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가난뱅이가 술을 먹는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여기고, 가던 길을 가는 것도 행복한 삶의 태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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