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매체에 ‘빌런’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악당’, ‘괴짜’란 뜻을 지닌 영어 ‘villain’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주로 타인에게 나쁜 행동을 일삼거나 피해를 입힌 사람을 일컬을 때 많이 언급한다. 근래에는 활용 범위가 넓어져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도 ‘빌런’을 수식어처럼 붙인다. 

가령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을 ‘과자 빌런’으로 부르는 식이다. 그런데 이 단어 유래를 살펴보면 ‘민중의 한(恨)’이 느껴진다. 빌런의 영어표기인 ‘villain’은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에서 비롯됐다. 빌라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장에서 일했던 농민 계층이다. 이들은 영주와 귀족의 차별과 횡포에 시달리다 반란을 일으켜 약탈과 폭행을 일으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에서 파생된 단어인 탓인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을 설명할 때 ‘빌런’을 꾸며주는 단어로 쓰는 악당이나 인물을 천천히 살펴보면 ‘절대악(惡)’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단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빌런’이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든 이유가 무엇일까. 올해로 성인이 된 지 20년째다.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각양각색 인간군상을 직·간접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접했다.

이 중 가장 위험한 인간상(像)을 하나 꼽는다면 ‘자기 확신에 찬 빌런’이다. 보통 이런 부류는 남의 얘기를 안 듣거나 귀찮아한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서 구성원에서 관리자로 지위가 격상되거나 수장에 올랐을 때다.

겉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하지만 결국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간다. 이는 자신의 결정이 ‘선(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직과 단체의 명운을 가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할 수 있는 변곡점이 됐던 미드웨이 해전을 소재로 다룬 영화 ‘미드웨이’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잡았던 이유를 양측 지휘관의 의사결정 방식에서 찾았다. 일본군은 미군의 작전을 예측한 부하 의견을 무시한 반면, 미군은 부하 의견을 존중하고 작전에 반영했다. 그 결과는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한때 아시아 전역을 넘보던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수순을 밟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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