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경 인천문인협회 이사
지연경 인천문인협회 이사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필 한 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제목은 ‘국화 할머니’였다. 당시 청량산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내 아파트는 한적한 곳에 위치했지만, 주변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불편한 게 많았고 이웃과도 왕래가 없이 지루하게 몇 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봄날, 호미와 모종삽으로 화단 빈 곳에 무엇인가를 심는 할머니를 만났다. 굽은 허리에 칠순은 족히 돼 보이셨다. 바로 옆집으로 할머니가 이사를 온 것이다.

"할머니, 뭐 심으시는 거예요?"

"응, 이거 한번 심어 보려고."

할머니가 심은 국화(菊花)는 잘 자라서 오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고, 특히 우리 아파트 입구는 예쁜 국화로 꽃 대궐처럼 이웃들의 눈길을 끌어 행복했다. 할머니와 나는 먼 친척보다 낫다는 이웃사촌처럼 틈만 나면 함께 잡초도 뽑고 물도 주고 커피도 마시며 말벗이 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로부터 예상하지 못한 인터폰이 왔다. 

"나, 이사 간다. 애들 잘 키우고…"

한 점 혈육인 아드님이 말기 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아파트를 전세 놓고 며느리와 멀지 않은 곳에 김밥집을 계약하신 후 서둘러 이사를 하셨다. 할머니가 떠난 후, 하나 둘 국화가 사라진 화단은 휑한 공터가 됐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며칠 전 분리수거를 하려고 가는 중, 낯익은 젊은이가 지나갔다. 어디서 봤던가? 불현듯 할머니의 돌아가신 아드님 모습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뒤를 쫓아갔다. 다행히 그는 친구와 출입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예전에 여기 살던 00 아저씨 아드님 아닌가?"

"예, 맞는데요.

"그럼 할머니는?"

궁금한 마음에 다급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 돌아가셨어요."

두어 달 전 손자인 그는 이곳으로 이사를 와 할머니가 물려주신 보금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렸단다. 할머니가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손자가 벌써 결혼을 하고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국화를 유독 좋아하셨던 할머니와 젊은 나이에 간이 나빠 복수가 차 투병하다 돌아가신 아들의 대를 이어 믿음직스레 자란 손자까지 삼대(三代)를 이곳에서 이웃으로 지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할머니의 분신인 손자가 이사를 와 화단이 전처럼 국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국화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와의 희미한 추억만 낙엽처럼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 아파트와 함께한 지난 3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둘째가 여기서 태어났고,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이웃으로 이사를 와 극적인 해후를 했다. 국화 할머니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15년 동고동락했던 애완견을 하늘나라로 보낸 아픈 기억도 있었다.

되돌아보니 내 인생 절반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래선지 우리 아이들도 이곳을 고향이라고 여긴다. 한때는 평생 이사를 하지 않고 계속 이곳에 둥지를 틀까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점점 고향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시절이기에 이곳을 애틋한 향수의 발원지로 자식들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얼마 전,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사를 가기로 큰 결심을 했다. 이사를 앞두고 허허로운 가슴을 달래며 아파트단지를 걸어본다. 화단을 묵묵히 지켜온 생강나무 가지엔 이른 봄바람을 한껏 마신 싹 봉우리가 막 터져 오를 기세다.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니 겨울 동안 꽁꽁 언 땅속에서 잠을 자던 풀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중엔 가장 먼저 땅을 비집고 목을 내민 파릇한 쑥 잎이 나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다. 며칠 후면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나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듯 아쉬운 표정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내가 이 아파트에서 할머니를 만났고 이별을 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게 마련 아닌가. 하지만 헤어짐은 새로운 인연을 기약하기에 이별이 마냥 서러운 것만은 아니다. 가을에 꽃이 지지만 봄이면 새싹을 틔우던 단지 내 화단처럼 말이다. 새로운 이웃과 또 다른 인연을 기대하며 오늘도 이삿짐을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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