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시문인협회 이사
황흥구 인천시문인협회 이사

아내가 거실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면서 혼잣말로 "이 많은 팬티들을 어떻게 하지, 새것들인데 전부 버릴 수도 없고…"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TV를 보고 있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내 의중을 떠보며 하는 소리다. 장인께서 그동안 입었던 팬티 때문이다. 장인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꽤 됐다. 돌아가시기 전 두어 달 남짓 우리 집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장모님은 관절염으로 멀리 바깥 출입은 못하셨어도 장인어른은 일 년에 몇 번씩은 휴가 때가 되면 우리 내외와 함께 곧잘 며칠씩 펜션이나 콘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을 다쳐 수술하고는 멀쩡하던 다리가 도지더니 최근엔 집에서도 거의 두문불출이셨다. 거기다 갑자기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원에서도 연로해 더 이상 손쓸 수가 없으니 집으로 모셔가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단박 집으로 모시자니 간병이 문제였다. 장모님도 건강치 못한데다 자식들이 있지만 두 아들은 사업과 직장 관계로 외지에 나가 있고 딸들도 있지만 모시기에는 모두 형편이 여의치들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바로 우리 집으로 모시게 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장인어른은 우리가 모시자고 내가 적극 앞장서기도 했다.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때 장남인 내가 모시지 못하고 둘째 동생이 모시다가 말년에는 요양원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이 늘 한이 됐던 터였다. 

장인 모신다고 해봐야 나야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게 일이지만 매일 씻기고 닦고 먹이고 갈아입히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은 일로서 전부 아내 몫이었다. 친정아버지 모시는 게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만 아내는 또 몇 년째 맞벌이 하는 딸애의 손녀도 돌봐 주고 있어 더욱 힘들게 된 것이다. 장인어른이 병원에서 집에 오시던 날, 아내는 먼저 시장에서 팬티 등 속옷부터 한 보따리 사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방 하나 비워 줄곧 침대에서 지내시게 했다. 처음에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당신 스스로 용변을 보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침대에서 옆으로 눕기에도 힘들어 하셨다. 한참 더운 복중에 오셔서인지 지린 용변과 땀으로 냄새가 진동했지만 아내는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하루 종일 붙어 앉아 대소변을 받아냈다. 욕창이 날까봐 수시로 모로 드러눕게 해 약을 발라 주는 등 힘든 간병 생활을 버텨 냈다. 때로는 피고름이 팬티에 엉겨 붙고 분변에 푹 젖은 묵직한 팬티를 벗겨 낼 때도 많았다. 이런 날들이 잦더니 더 좀 사실 줄 알았으나 두어 달도 안 돼서 추석명절을 며칠 앞두고 저 세상으로 조용히 가셨다. 지금도 방문을 열면 방 가운데 침대에 누운 장인어른이 넌지시 일어날 것만 같다. 

아무리 환자라 할지언정 장인이 있어 집안이 꽉 차고 온기가 있었는데 이젠 빈집 같고 쓸쓸하다. 슬며시 방문 열고 눈을 마주치면 빙긋 웃어주던 장인어른이 그립다. 장인어른이 마지막 남긴 것이라고는 외출할 때마다 쓰셨던 태극마크가 달린 모자와 왼쪽 가슴에 부적처럼 달고 다니셨던 한국전쟁 참전 기장, 그리고 팬티 몇 장이 전부였다. 장인어른은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특히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해 백마고지전투 등 크나큰 전투에는 모두 참가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다고 하시며 참전용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아내가 빨래를 개면서 또 한마디 시작이다. "이 팬티 어떻게 하지? 아직은 새것인데…" 장인이 입던 팬티를 바라보며 버리기 아까운 것이다. "뭘 어떻게 해요, 내가 입어야지."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 나왔다. 요즘 난 헐렁하고 펑퍼짐한 장인팬티를 입고 다닐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무리 욕창으로 피고름에 묻었었고 분변으로 범벅된 팬티라 했더라도 장인의 따스한 살결과 인생 고비마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장인의 팬티를 입고 항상 난 장인어른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