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50년 전인 1871년 6월 1일 신미양요라 불리는 미국과의 접전이 강화도 초지진에서 발생했다. 전쟁이라는 용어가 걸맞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에서는 양요(洋擾), 즉 서양인에 의해 야기된 소요 정도로 보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 군사 작전(Korean Campaign 1871) 또는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 했고 조선 원정(Korean Expedition)으로 보도했다.

미국 함대가 조선에 등장하게 된 것은 1866년 발생한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 때문이었다. 미국의 해외 진출은 1865년 남북전쟁이 종료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제너럴셔먼호는 대청(淸)무역 상인이었던 프레스턴이 톈진 주재 영국 무역회사와 계약을 맺어 개인 무역선으로 등록하면서 개명된 선박이었다. 대포 2문을 보유하고 승무원들이 무장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어 평상시에는 통상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유사시 약탈선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상업선이었다. 

셔먼호는 조선에 갖고 갈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선적하고 톈진에서 지푸를 거쳐 1866년 8월 21일 평양에 도착했다. 조선 측은 당연 즉각 퇴거 요구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불법적으로 수심을 측량하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만경대에까지 도달했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육지 상륙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 군민과 충돌했는데 셔먼호의 대포 발사로 인해 조선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에 평양감사 박규수의 지휘하에 화공(火攻)을 단행, 셔먼호는 전소하고 승조원 24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실은 병인사옥 후 조선에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에 의해 청국의 미국영사에게 알려졌고 미국은 진상 파악과 행방을 찾기 위해 1867년 1월과 1868년 4월 2차례에 걸쳐 탐문 항행을 단행했지만, 셔먼호가 평양에서 분별 없는 폭행을 자행했기 때문에 전멸당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을 아시아 침략의 경제, 군사적 기지로 만들어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야욕은 증폭돼 갔다. 1870년 11월, 미국은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조선 원정’을 합의했다. 그리고 일본에게는 조선에 대한 자료 제공과 길잡이로 나설 것과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보급, 수리, 정탐기지로 제공받았다. 침공 부대는 기함 콜로라도호를 비롯해 군함 5척, 대포 80문, 해병 1천230명으로 구성됐고, 원정군 다수는 링컨의 남북전쟁 참전 경험자였다. 1854년 페리제독이 일본을 함포외교로 개항시켰던 것처럼 조선을 개항시키려 구상했던 것이다. 미국 함대는 1871년 5월 27일 인천 제물포를 지나 강화도에 도착했고 5월 29일 작약도에 정박했다. 6월 1일의 첫 교전이 있은 이후부터 10일까지는 율도 해변에 장대에 편지를 꽂고 의사를 소통하는 ‘장대’외교가 시작됐지만, 통상 소통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6월 10일 오전 10시 미군의 초지진 상륙작전이 개시됐고 광성보에서 어재연 형제를 비롯한 조선군의 대항은 격렬했지만 전투 결과는 처참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전사 350명, 부상 20명이었다.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정부의 통상 거부로 더 이상 오래 머물 수 없었던 미군은 셔먼호에 대한 진상조사도 조선과 통상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7월 3일 중국으로 철수했다. 미군은 손돌목돈대에 휘날리던 사령관 어재연 장군기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해 부대기 50점,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481점을 약탈했다. 이때 미국의 종군 사진작가 페리스 비토는 신미양요 사진첩을 남겼는데 우리 땅에서 벌어진 서양과의 전쟁을 기록한 최초의 보도사진이자 조선의 이미지가 기록된 최초의 사진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게 됐지만 조선 정부는 끝내 서세동점과 제국주의의 발호라는 시대 기류를 외면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조선 정책을 확인해 가면서 자신들의 조선 침략 정책을 구상했고,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로부터 4년 뒤 일본이 치밀하게 획책한 1875년 9월의 운요호 침공에 조선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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