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 시인
문계봉 시인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후, 그악스러웠던 바이러스 공세가 잠시 주춤해지자 균형을 잃었던 삶의 기제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한 위장된 조용함을 우리는 경험했다.

그래서 눌렸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타의에 의한 유폐의 시간을 힘겹게 견뎌오던 많은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로, 공원으로, 술집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본디 발생 배경이 불확실한 조용함은 대개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는 법이다. 

초대형 태풍도 그 눈 속은 고요하다.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조용한 사람의 폭발하는 성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조짐도 없이 도둑처럼 은밀히 찾아오는 바이러스의 가공할 조용함이나 하룻밤 사이에 불쑥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계절의 변화처럼.

조용한 것과 평화로운 것은 유의어가 결코 아니다. 평화롭다는 것은 모든 시시비비와 인간의 희로애락이 사상된 지상낙원과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고통과 절망, 사람 사이의 시시비비가 존재하긴 하지만 내부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응전력, 다시 말해서 시련을 통해 그 내부를 더욱 단단하게 벼릴 수 있는, 회복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러스가 폭풍처럼 몰려왔다 잠시 주춤한 20여 일간의 조용함은 결코 평화로운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항상 큰 부대의 본진(本陣)은 나중에 당도하는 법이다. 척후(斥候)들과의 싸움에서 일시적으로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본진의 공세에 대비하지 못할 경우 전투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너무도 낯설고 발 빠른 바이러스의 척후들과 싸움도 만만찮은 일이었지만 아직은 숨 돌릴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평화로움으로 위장한 시간의 발칙한 위장술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적의 성격과 싸움의 본질, 전술적 대응에 대해 원점에서부터 다시 총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다. 

물론 우리는 낯선 적(코로나19)과의 초동 전투에서 비교적 선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획득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적의 포악성과 기동력, 공격의 패턴, 주요 타격 방향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는 유력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이번 싸움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가 견지했던 삶의 유형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그간의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물신주의,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온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지구공동체의 다른 종에 의해 멸절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한 의미 있는 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문명이란 일견 견고해 보이고 그 영광이 영원할 것 같지만 한편으로 약한 고리들, 이를테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보이는 의도적인 배척과 소외, 지구환경에 대한 교만함, 다른 종들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 등등에서 비롯된 인간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나 깨어진 연대의 허약한 고리를 타격할 경우, 언제든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추스르고 변화시킬 다양한 지점들을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치는 여전히 촌스러운 난맥들을 노정하고 있고, 그로 인해 민심은 양분되고 각각의 이해를 대변하는 나팔수들은 치킨게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사법기관은 권력과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국민에게 상처 주기 일쑤고, 종교지도자들은 지옥을 예약해 놓은 듯 혹세무민하는 데 혈안이 돼 있으며, 상당수 언론은 쓰레기로 치부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도무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본래 제자리로 돌아가기란 왜 이다지도 어려운 건지 회의를 넘어 분노가 느껴지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분노와 적개심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느슨하지만 다양한 층위의 연대들이 복원, 형성돼야 한다. 정치가들에게만 정치를 맡길 일이 아니다. 환경부 공무원들에게만 환경의 문제를 맡겨서도 안 된다. 국민들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체가 돼 자신을 둘러싼 제 사안들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주체적인 의지들이 다양한 층위의 연대를 통해 확장돼 가는 과정 속에서 국민들은 학습하고 교육하고 조직화하기 때문이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바이러스는 여전히 이곳에서 극성이지만, 이러한 바이러스의 집요한 공세를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시련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의미 있는 경고와 남긴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두려움과 패배감을 떨쳐버리고, 서로를 경계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이 짐승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이웃들의 행복한 공존을 이뤄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견지해 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봐야 하는, 날카로운 비판과 성찰의 시간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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