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지인을 보러 나선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욕망의 집약체였다. 비단 서울만 그렇다고 하면 어폐(語弊)가 있겠으나 그래도 서울은 가까운 인천을 비롯해 뭇 도시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풍모를 지녔다. 서울의 몸은 한국전쟁 이후 인구의 급격한 쏠림으로 비대해졌고,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 명예를 좇아 상경한 도시로 발육했다.

그러한 도시 한가운데서 2020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하고 소비하고 쾌락을 잠시 향유했다가 텅 빈 곳간을 보고 분주히 다시 채워넣기를 반복하는 무한 순환의 고락(苦樂)이다.

이 질서에서는 욕망하지 않는 자, 늘 비워내고 금세 다시 채워내지 못하는 자는 한마디로 ‘루저(loser)’로 취급된다. 서울의 자본이 최신으로 빚어낸 이 욕망을 취하지 않는 자는 세련된 삶을 따라가지 못한 아웃사이더이자 첨단 세계와 교류하지 못하는 아날로그적 고집불통이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의 속도, 이 자극의 세기, 이 순환의 고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고 빠른 곳이 서울이다.

한발짝 떨어진 인천과 경기, 충북과 강원으로만 가도 이 속도는 느려진다. 욕망의 순환이 느슨하다는 것은 욕망의 대상·동기·작동 메커니즘과 해소 프로그램이 서울처럼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여 있지 않다는 의미다. 욕망의 프로그램이 잘 짜여 있지 않아도 외곽도시의 삶이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욕망을 베낀 유사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유사품마저 취하지 않아도 서울만큼 비난받거나 좌절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울처럼 자꾸 욕망해야 할까.

욕망을 들여다 보면 밖에서는 자본이 헌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라고 부추기고, 안에서는 새것을 취할 때 맛본 쾌락의 호르몬이 고갈돼 새로운 분비를 기다린다. 하지만 더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가진 헌것은 전혀 헐지 않았고, 갓 출하됐다는 새것은 자본 측 제품개발 파트에서는 이미 단종을 준비하고 있다. 또 몸은 새것이 헌것이 되는 긴장과 이완의 순간, 잠시 쾌락을 느끼지만 몸과 마음에 가장 좋은, 가장 이로운 상태는 긴장과 이완이 없는 중간의 고요다. 자본은 이 고요를 가장 경계하기에 비생산, 지루함, 의미 없음이라고 이를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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