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은 어떤 해였을까? 이 질문에 우리는 개인적인 삶을 토대로 아름답거나 치열했던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1994년은 김일성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해였다. 또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국가적 열망이 팽배했던 시기로, 성장을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는 높은 학구열로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망 속에서 개별적인 삶을 살아간다. 영화 ‘벌새’ 속 은희의 이야기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을 담았다. 그러나 1994년이라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 소녀의 이야기는 보편적 삶으로 확장된다.

학군 좋기로 소문난 대치동에 은희네 가족이 산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항상 바쁘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까닭은 자녀 교육 때문이다. 그러나 매일 놀러 다니는 큰언니는 혼나는 일이 일상이다. 반면 한 살 터울인 오빠는 집안의 희망이다. 공부 잘하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편애를 독차지한 그는 자주 은희를 때린다.

어느 날, 귀 뒤에서 이물감을 느낀 은희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지만 바쁜 부모님은 병원을 지키지 못한다. 은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홀로 시간을 보낸다. 한 지붕 아래에서 숟가락을 부딪히며 살아가지만 가족구성원들은 각자의 삶을 사느라 모두 분주하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덤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소녀 은희는 자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런 감정을 또래의 남자친구나 절친한 친구, 학교 후배를 통해 느끼고 싶었지만 관계는 변덕스러웠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관계의 붕괴를 경험할 때마다 소녀는 어찌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은희는 한자 학원 영지 선생님을 만나 교감한다.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영지 선생님이 은희는 참 좋았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마저도 어느 날 말 없이 사라진다. 예고 없이 날아든 또 하나의 상처를 애써 지워 갈 때 즈음 성수대교 붕괴 소식이 전해진다. 천만다행으로 은희 주변에 희생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무렵, 붕괴 사고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은희에게 상처를 남긴다.

영화 ‘벌새’는 중학생 은희가 살아간 1994년의 개인적인 삶의 궤적을 쫓고 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부단히도 미끄러지지만 삶의 의미인 이해와 사랑을 찾아 노력하는 은희의 모습은 1초당 90번의 날갯짓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벌새와 닮았다. 멀리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 소녀의 삶은 자세히 보면 사회적 사건과 분위기 속에 직조됐다. 

영화 ‘벌새’는 이렇듯 평범한 개인의 삶에 시대적 기억을 포개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특히 사춘기 소녀 은희가 겪는 다양하고 미세한 감정의 진폭을 세심하게 포착해 치열하지만 담담하게 쌓아 올린 오늘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