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교수
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교수

지난해 카톡으로 온 만화 한 편을 보고 무릎을 친 일이 있다. 네 컷짜리 그 만화에는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새 두 마리가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게 사람일까?" "걱정 마. 저건 허수아비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휴대전화를 안 보고 있잖아!" "맙소사!" 

최근 ‘포노 사피엔스’라는 말이 생겨났다. 같은 이름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포노 사피엔스’라는 말은 2015년 ‘이코노미스트’ 특집 기사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휴대전화로 검색해 봤다. 2015년 6월 2일자 「시사상식사전」에는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세대"라고 적혀 있다. 2018년 8월 6일자 「한경 경제용어사전」에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라고 풀이한다. 각 사전에 등록된 시기가 3년 정도 차이를 보이는데, 그 서술에 숨은 시각차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전자에는 어느 정도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을 염려하는 듯한 태도가 엿보이는 반면, 후자에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알리는 듯한 놀라움이 담긴 듯하다.

나의 일상을 재구성해본다. 깨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스마트폰의 알람이 나를 깨운다. 밤사이에 온 카톡이 없었는지, 새로운 뉴스는 없는지, 날씨는 어떤지, 지인들의 SNS에 새로운 글이 올라온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세상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은 토스트를 만들어 먹을 생각이다. 주방 창문에 걸쳐 놓은 태블릿을 켠다. 레시피를 검색한다. 모든 정보가 폰으로 제공된다. 출근을 한다. 아는 길이지만 폰으로 ‘내비’를 켠다. 여행이나 먼 길, 특히 초행길에는 내비가 필수다.  

요즘은 코로나19 탓에 한 학기 내내 비대면 수업한다. 수업 동영상은 노트북을 통해 올리지만, 수시로 학생들로부터 문자를 받는다. 예전에는 학생들의 문자를 받는 일이 드물었다. 폰으로 문자가 오면 즉석에서 답할 수 있다. 사람들과 접촉인 셈이다. 은행 갈 일도 드물어졌다. 서점 갈 일도 매우 적어졌다. 예전에는 어떤 책이 출판됐는지 일주일에 한 번쯤 일부러 들러보곤 했는데, 이제 검색도 구매도 폰으로 해결한다. 심지어 아침에 주문하면 오후에 책이 배달되기도 한다. 아뿔싸, 고마우면서도 ‘총알’ ‘로켓’ 배송을 위해 비지땀 흘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이 안 되자, 시중 공공 도서관이 휴관하면서, 택배 대출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주말에 산에 오른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다. 서랍 속에 수두룩한 각종 디카들. 저것들을 쉽사리 꺼내 들 것 같지가 않다. 산행을 마치면 사진을 골라 SNS에 올리기도 하고, 여러 채팅방에도 퍼 나른다. 지금 쓰고 있는 문화칼럼의 집필진 채팅방도 수시로 들여다본다. 읽고, 올리고, 적절한 이모티콘도 날리고. 채팅방은 하나의 소규모 사회다.

곰곰 생각해보면, 전에 없었던 그러나 벌써 익숙해진 소통 방식이다. 알게 모르게 나도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포노 사피엔스가 됐다. 만일 스마트폰이 없다면 어떨까? 전에는 집을 나설 때 지갑을 반드시 챙겨야 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꼭 챙겨야 한다. 

아직도 혹자는 스마트폰 중독을 경계한다. 그러나 스마트폰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시답잖지만, 스마트폰 때문에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알람이 새벽을 흔들던 자명종을 치웠고, 아침 신문 구독을 끊은 지 이미 오래고, 요리책도 필요 없고, 지도책도 필요 없고, 노래책도 사지 않는다. 

고백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면 누구랄 것 없이 일제히 스마트폰을 켜고 앉아 있는 풍경이 꽤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신문이나 책 한 권 들고 있는 사람이 없다니 하는 푸념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아니 인정하자. 스마트폰이야말로 가족들과 지인들과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며, 세상의 모든 지식과 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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