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자연과학 분야의 대표적 저술을 꼽으면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가 빠질 수 없다.

홍만선은 남양주시 진접지역의 역사인물로,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다. 하지만 그가 지은 「산림경제」는 정약용의 삼농(三農) 사상,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학연의 「종축회통(種畜會通)」 등으로 이어지며 남양주 농학 학술의 전통을 이뤘다. 남양주 농학사가 곧 조선후기 농학 발달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한국 실학의 선구적 농서 ‘산림경제’ 표지(왼쪽). 규장각한국연구원 소장. <‘산림경제’란 책명 유래가 나와 있는 복거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한국 실학의 선구적 농서 ‘산림경제’ 표지(왼쪽). 규장각한국연구원 소장. <‘산림경제’란 책명 유래가 나와 있는 복거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명문가에 나서 지방관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다

홍만선은 1643년(인조 21) 예조 참의를 지낸 홍주국(洪柱國)과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딸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가로, 증조부 홍이상(洪履祥)은 대사헌을 지냈고 조부 홍영(洪霙)은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그의 할머니는 좌의정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딸이었다. 

홍만선은 1666년(현종 7)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다 1682년(숙종 8)에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로 처음 벼슬길에 나갔다. 1696년(숙종 22) 대흥군수(大興郡守)로 복무할 때 전국에서 19명을 선발하는 선치수령(善治守令)에 뽑혔다. 

그는 1710년(숙종 36) 음직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됐다. 당시 음직으로 ‘정(正)’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직책이었다. 

만년에 홍만선은 외재종인 이희조(李喜朝)와 상례(喪禮)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홍만선의 시문집이 발견되지 않아 그의 삶과 사상을 온전히 구성하기 어렵지만, 인천도호부사·상주목사 등 지방관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성과를 올린 지방관으로 농민들의 칭송을 받고 당파를 떠나 자질과 풍격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조현명, 「귀록집」 참조)

홍만선은 부친 홍주국의 묘역에 함께 묻혀있다.
홍만선은 부친 홍주국의 묘역에 함께 묻혀있다.

#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선구적 학풍을 일으키다

「산림경제」는 조선후기 선구적 실학자의 대표적 명저다. ‘이용후생(利用厚生·상공업을 발전시켜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아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정작 홍만선은 주목받지 못했다.

부친 홍주국이 송시열에 동조하다 예송 논쟁에 휘말려 파직당하고 죽음을 맞자 홍만선은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려 마음먹는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향에 따라 꽃과 대를 심고 적성에 맞추어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것, 이것이 곧 산림경제(山林經濟)이다’라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음미하고 뜻을 취해서 책 이름으로 삼는다"(홍만선, 「산림경제」 서문 중에서)

홍만선이 책 이름을 산림경제로 한 건 화훼와 나무를 심고,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것을 산림에서의 경제활동이라고 하는 옛사람의 말에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옛사람은 허균을 지칭하고, 해당 문장은 「한정록」 유사(幽事)편에 나온다.

「한정록」의 여러 제목을 토대로 세분화하거나 확대시켜 「산림경제」를 구성해 「한정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정록」이 중국 문헌 중심이라면 「산림경제」는 중국 저술과 국내 저술에서 유용한 방법을 모으고, 지방 수령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경험한 여러 방법과 직접 실시한 방안까지 총망라해 실용성을 더했다.

# 농민들의 삶을 이해하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는 당시 사대부의 산림생활의 지침서였고, 학술적으로 농업기술에 관한 한 18세기 이후 새로운 농서 발간에 크게 기여했다.

「산림경제」는 농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해를 토대로 16지(志, 편목의 단위)로 구성돼 있다. ▶주택·거옥(居屋) 등을 세울 터를 선정하는 복거(卜居) 편 ▶과욕 절제, 폭식 근절, 신체 단련법과 약물 복용법 등 수명 연장을 다룬 섭생(攝生) 편 ▶벼·기장·수수 등 각종 곡식류의 재배법 등 농사 관련 내용으로 구성한 치농(治農) 편 ▶규종법(畦種法) 등 원예작물을 심는 법을 통해 수박·참외·생강·쑥갓 등 채소류와 맨드라미 등 화초, 그리고 버섯 등의 재배법을 밝힌 치포(治圃) 편 ▶접붙이는 법과 병충해 방지법, 뽕나무 등 과수(果樹)와 나무 재배법을 다룬 종수(種樹) 편 등이다.

홍만선은 일상생활에서 긴요하게 사용되는 것을 중심으로 농서를 구축했다. 176종 약재와 복용법, 옷에 묻은 기름 빼는 법 등 백성들의 삶의 지혜를 담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 책을 지었다.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이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이본.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아내와 같은 날에 함께 돌아가다

조현명(趙顯命)은 홍만선에 대해 사람들과 잘 섞이지만 속류에 떨어지지 않았고, 청렴해 서로 원수처럼 공격하고 시비를 거는 반대파라도 그를 만나면 모두 수긍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농민들도 칭송하며 조선에서 ‘순량리(循良吏, 법을 지키고 이치를 따르고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관리)’를 뽑는다면 홍만선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평생 노산처럼 훌륭한 인사를 알고 있어 기뻐했나니, 고상한 자품 맑은 지조는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할 만하였지, 시비와 무관하니 감복한 지 오래였네."(이건명, 「홍정만선만(洪正萬選挽)」 중에서)  

신임사화 때 희생된 노론 4대신 중 한 명인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은 홍만선의 부음을 듣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건명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선정을 베풀고 산수와 풍류를 즐기며 청빈하게 삶을 살다 죽은 당나라 원덕수(元德秀)에 홍만선을 비겼다. 고상한 성품, 청렴함,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형제와 우애 있게 평생을 지냈다고 회상했다.

홍만선이 7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을 더 슬프게 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아내 성산 이씨(星山李氏) 부인도 홍만선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평생을 같이 보내고 같은 날 같은 곳에 묻혔으니 두 부부의 애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 수 있다.

부부는 현재 남양주 진접읍 내각리인 풍양(豊壤)에 묻혀 있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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