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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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인천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20.06.26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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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최근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유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 전사자 12만2천609명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기획된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 ‘끝까지 찾아야 할 122609 태극기’ 행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전사자 유골함을 감싼 태극기 배지의 모습이 귀환하지 못한 국군 전사자의 이미지와 부합한 데서 이를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학생들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이 행사는 한국전쟁을 경험치 못한 젊은 세대들이 전쟁의 아픔을 이해하는 계기가 돼 더욱 뜻깊다. 

서양의 경우, 영국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프랑스, 뉴질랜드 등에서 양귀비꽃이 순국 장병을 기리는 상징으로 쓰인다. 영국은 현충일인 11월 11일 ‘포피데이(Poppy Day·양귀비의 날)’라 하여 이날을 전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나 모형을 달고 다닌다.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과 연예인, 축구 선수 등 유명인들도 마찬가지다. 영국과 미국 등에서 포피(양귀비)가 보훈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한국판 포피’로 태극기가 활용된다고 하니 경건함이 더해지는 것 같다.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1882.5.22),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이때 미국의 전권특사 슈펠트는 조선이 조인식에 독자적인 국기를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여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만들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홍집이 역관이었던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이응준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 태극기는 조인식에서 미국의 국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그리고 그 게양된 장소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자유공원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위 작은 분지였다.  

그러므로 태극기가 최초 게양된 지역은 인천이었다. 그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만든 태극기가 최초가 아니라, 이보다 4개월 앞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시에 만든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국기’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태극기 필요성이 제기된 이래, 1882년 미국, 영국, 독일, 1884년 이탈리아, 러시아 등 통상조약을 맺을 때마다 태극기가 사용됐다. 1883년 왕명으로 태극 4괘 도안의 기를 국기로 제정했다. 그러나 당시 국기 제작에 대한 구체적 명시가 없어 이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1893년 조선이 처음으로 참가한 시카고 만국박람회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태극기가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홍보됐다.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식과 명성황후의 국장 행렬에도 태극기가 사용됐다. 1906년 의병들이 일어나 국권 상실에 항거할 때에도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복을 맞이할 때에도 태극기는 애국심의 상징이었다.

한편, 그동안 연구자들이 태극기의 창안과 제정 과정에 대한 여러 이견(異見)을 수합하려는 다양한 논의를 이어 간 끝에 창안자가 역관 이응준이었고,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다만, 최초 태극기가 태극 8괘였는지 4괘였는지 문제는 보다 실체적 자료 보완과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미 해군성에서 1882년 7월 발간한 책자, 「해상국가들의 깃발」에 나오는 태극과 4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에 사용됐던 태극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을 가던 박영효가 선상에서 미리 준비해 온 (이응준의) ‘태극팔괘도’를 영국 영사에게 제시했는데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가 "너무 복잡해 식별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 ‘8괘도에서 괘 네개를 뺀’ 4괘도로 고쳤다는 박영효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 내용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의 태극기 원본을 볼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이다. 

이 시대 태극기로 상징되는 현충과 호국, 이를 오마주(hommage)한 배지를 통한 순국 장병 귀환 프로젝트는 역사 속에서 인천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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