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 "엎드려, 고개 들면 안 돼…" 아버지의 단호하고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드르륵드르륵… 탕 탕…" 한바탕 기관총 소리가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동생들과 나는 겁에 질려 논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총소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총소리가 잦아들자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털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방과 함께 38선 이북에 진주한 로스케는 피난민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해 뜰 무렵부터 간헐적으로 총을 쏘아댔다. 원래 고향은 이남이지만 해방 이전에 일가족이 숙부가 있는 함경도 영흥에 올라가 십여 년 동안 살면서 땅도 장만했으나 공출로, 토지개혁으로 다 빼앗기고 더 이상 살 수 없어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수중에 돈이 있다면 안내자를 대동하고 무사히 임진강을 건널 수 있겠지만 무작정 집을 나선 아버지는 다섯 식구와 함께 살던 곳을 야반도주하듯 떠났다. 해방 나든 해 이곳에서 결혼한 나는 돌도 안 지난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자리를 잡은 후 따듯한 봄이 되면 다시 데리러 오기로 약속하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이다.

#. 1950년 12월, 두만강 앞까지 진격한 유엔군과 국군은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때 모든 사람이 피란길에 함께 나섰다. 이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피난민을 싣고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다섯 살 난 아들을 등에 업고 무작정 흥남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흥남부두에는 벌써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피란민들로 꽉 들어찬 군함 또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으며 미군들이 갑판에 서서 피란민들을 더 이상 못 올라오게 하려고 밀치며 제지하기에 바빴다. 다행히 젊은 병사가 어린애를 들쳐 업은 내 모습이 안 됐던지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마지막 피란민을 실은 군함에 오른 것이다. 며칠을 항해한 배는 거제도에 도착해 이곳에서 몇 달간 지내다 부산으로 옮겨 가게 됐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일하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누구나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린아이 데리고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가기란 더욱더 힘들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던 남편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 1982년 6월 초순, 아버지가 누런 편지 봉투를 내밀며 내게 읽어 보라는 것이었다. ‘부산진경찰서’에서 온 편지였다. 내용인즉 부산에 사는 아들이 해방 후 월남해 경기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아버지를 찾는데 사실이라면 경찰서로 연락하면 아들과 아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982년 6월 25일, 공교롭게도 이날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며 또한 이 뜻깊은 날에 헤어진 지 36년 만에 그리운 아내와 아들을 만나는 날이다. 경찰서장실에 미리 온 나와 아버지는 무척 상기돼 있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며 중년의 아들과 60대를 바라보는 부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떠날 때 방긋거리며 헤어졌던 그 아들이 바로 이 아들이란 말인가? 한쪽에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부인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헤어져 36년 만에 만난 오늘, 지금의 모습을 혹시 알아보지 못할까 봐 고개를 들고 있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조용히 다가가 아내의 두 손을 잡더니 "여보,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이제야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구려…." 

#. 아버지는 아내가 둘이다. 이북에서 아들 하나 낳고 평생 수절한 여인과 전쟁 통에 새로 만나 가정을 꾸미고 사는 또 다른 여인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생모였던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다 돌아가시고 한 분만 홀로 남게 됐다. 어언 95세, 어렵게 남편을 만났지만 만나서도 망부석처럼 살아온 아내가 하늘나라에서나 다시 만나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난 지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아직도 우리에겐 천만 이산가족이 헤어진 가족과 고향을 애타게 그리며 살고 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기원해 본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