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한국 도시농업관리사협회 회장
박진호 한국 도시농업관리사협회 회장

제품을 개발할 때 소비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가 결합돼 만들어진 신조어인 프로슈머(prosumer)란 말이 있습니다. 1980년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생산(producing)과 소비(consuming)가 결합된 경관을 프로슈밍(prosuming) 경관이라 합니다. 프로슈밍 경관은 시각적 소비의 대상이었던 종래의 경관과는 달리 생산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산경관(productive landscape)입니다. 풍경의 이미지를 감상하는 소비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주체의 참여와 생산이 도시경관에 적극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산적인 전업농과 달리 대부분의 도시농업은 농산물을 수확해 판매하는 곳에 주안점이  있지 않습니다. 안전한 먹을거리가 재배 목적이기도 하지만 직접 땀 흘리며 키우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혹은 자연을 가까이에서 접하기 위해서 호미와 삽 농기구를 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시의 농업생산 텃밭이 경관을 위한 정원(garden)의 다른 이름이라면 어떤 느낌인가요? 이제 도심에서 공원에서 텃밭은 많아질 것이고, 텃밭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할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텃밭이 정원입니다. 세련된 디자인의 도시경관이나 비일상적인 자연의 광경에서 감흥을 느끼기보다 작은 텃밭에서 땀 흘려 노동하며 더 큰 즐거움을 얻는 도시인들, 그 자체가 미학이 되는 것입니다. 텃밭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텃밭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행동, 표정, 어우러짐이 있을 때 미학적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도시농업이 정원을 미학적 대상의 가치로 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원 개념이 아닌 생산의 가치를 두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 생산적인 텃밭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공산국가인 소련이 1990년 문을 닫았습니다. 그 시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공산국가인 쿠바를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경제 봉쇄를 단행합니다. 석유가 바닥나니 가동되던 공장 굴뚝에 연기가 사라지고, 대단위로 밭을 일구던 트랙터도 멈추게 됐습니다. 식량배급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궁여지책으로 쿠바에서는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도시농업을 선택했습니다. 웰빙이 아닌 생존을 위해 육식에서 식단을 채식으로 바꾸고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도심의 빈 땅에 푸성귀를 경작했습니다. 

한 뼘이라도 가능한 공간에 벽돌로 경지를 구획해 경작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생존 투쟁으로 만들어진 텃밭이 ‘오가노포니코’(oganoponicos)입니다. 빈 땅 버려진 곳에 널빤지와 벽돌로 흙의 유실을 막기 위한 틀밭이요, 밭 속 미생물과 지렁이가 알아서 일구는 텃밭입니다. 또한 밭을 갈지 않아 표토층을 보호하며 땅의 생명력을 보존해 농사가 되는 말 그대로 게으른 텃밭입니다.

이 오가노포니코가 경제봉쇄의 쿠바를 살렸습니다. 채식을 안 하던 쿠바인이 채식을 하고, 농약이 없어 유기농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새로운 도시농업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오가노포니코 같은 형태는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농촌의 급격한 해체에서 아직 농촌의 습성을 간직한 부모 세대가 도심 옥상과 아파트 베란다에서 택배 스티로폼, 벽돌, 화분, 상자텃밭을 이용해 흙을 담고 상추, 토마토, 고추를 기르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도 우리식 오가노포니코를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쿠바의 경제 봉쇄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시행하던 오가노포니코, 쿠바와는 전혀 다른 대한민국의 도시농업 텃밭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어떤 교훈을 간직해야 할까요? 오늘도 베란다에 있는 스티로폼의 상추에 물을 주며 도시농업관리사의 인문학적 길을 모색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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