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멀리 살아서 왕래하지 못하는 친척보다는 자주 얼굴을 보고 사는 이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다. 우리 어릴 적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웃사촌이나 다름없었다. 이웃끼리 품앗이를 통해 농사일도 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르는 등 거의 모든 일을 함께하며 살았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했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웃사촌들은 어김없이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눴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다. 집집마다 대문은 늘 열려 있었고, 혹시 어느 집에서 기름 냄새라도 풍길라치면 얼마 후엔 영락없이 잘 익은 김장김치 송송 썰어 넣어 맛깔나게 부쳐낸 부침개가 아이 손에 들려 오곤 했다. 

산과 들, 온 사방이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끼니때가 되면 제일 가까운 동무 집에서 보리밥이나 수제비 한 끼 얻어먹어도 전혀 흉이 아니었다. 가끔은 늦게까지 놀다가 잠까지 자고 와도 서로가 부담을 느끼거나 피해로 여기는 일이 없을 만큼 정이 흘러넘쳤다. 형편은 가난해도 실제 생활은 넉넉한 인심을 나누며 공동체가 돼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 주거 양식이 철저히 개인 생활공간으로 분리되는 공동주택이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서로 마주할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아래층, 위층의 작은 소음에도 서로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내 주위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며 지내다 보니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거의 잊힌 말이 돼 버렸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수년을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래층 사람에게 ‘제발 밖에 나가서 피우세요’ 사정을 해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을 이웃사촌이라 할 수는 없다. 한밤중에 아이들이 쿵쿵 뛰어도 신경조차 쓰질 않거나, 사정없이 벽에 못을 박고 세탁기 돌리는 소리에 이웃이 힘들어 해도 오히려 이해할 줄 모른다며 불평하는 이웃이 어찌 이웃사촌일 수가 있을까? 

그러다 보니 이웃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다툼이 때로는 폭력과 송사(訟事)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다가구주택 주차장을 막고 있는 자동차를 다른 곳으로 빼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40대 남성이 이웃 주민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폭행을 했고, 아빠가 매 맞는 것을 지켜본 아이는 심리치료까지 받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지하주차장 출입구에 여러 시간 일부러 자기 차를 세워놓아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뉴스에도 등장하는 바람에 세간의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요즈음 이렇듯 이웃 간에 여러 가지 다툼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곳에서 긍정적인 모습들이 보여 퍽 반가운 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 단지에 함께 거주하는 주민들 중심으로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다. 주민들이라면 누구나 들어가 참여할 수 있는데 올려진 글들을 읽다 보면, 이런 모습들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도시 신개념 이웃사촌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밤늦게 어떤 아이의 엄마가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는데 걱정이네요’하고 글을 올리면, 즉시 ‘잘 듣는 해열제가 있는데 갖다 드릴까요’하는 응답이 온다. 외출했다가 돌아왔는데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올린 사람에게, 즉시 해결방법을 알려주는 이웃도 있다. 같이할 사람들을 모아 지역 특산물을 공동 주문해 택배비를 절약하는 지혜도 발휘한다. 카페를 통해 사용하지 않는 아이들 장난감이나 다 읽은 책들, 유아차(乳兒車)까지 무료로 건네주기도 한다. 농사일을 품앗이하고, 관혼상제를 함께 치르던 시절과는 사뭇 다르지만,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그나마 이웃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한 공영방송에서 ‘이웃사촌 프로젝트 무지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하나로, 단절된 마음의 벽을 허무는 그날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힘차게 시작한 프로그램은 얼마 진행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낮은 시청률 탓이었겠지만 공영방송마저도 이웃 간 마음의 담장을 허물지 못했던 ‘이웃사촌 만들기 프로젝트’, 이제 지자체가 나서서 다시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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