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공도와 공심으로 세상 일깨운 ‘동강노인(東江老人)’ 이항복
상태바
10. 공도와 공심으로 세상 일깨운 ‘동강노인(東江老人)’ 이항복
소탈한 농사꾼이 된 양반 ‘바른 소리’로 세속 꾸짖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7.07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명청 교체, 일본의 막부 교체 등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사건이 무더기로 쏟아졌던 시기, 이항복은 국제 정세의 한가운데 있었다.

 조선 역사서에 이항복은 ‘해학을 잘하고 익살스러웠으며 세상을 가볍게 여기며 즐기는 사람’(선조실록 참조)이란 비난 아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관직생활 26년 동안 병조판서만 5번 역임했고 43세 때 우의정에 오른 이후 20여 년을 정승 자리에 있었다.

 뛰어난 문장력과 행정 능력을 갖춰 ‘통재(通才)’로 일컬어지는 우수 관료의 전형이었던 그는 소탈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정치가로서 호폐제도를 실시하고 공납(貢納)을 개선하고 대동법을 건의하는 등 개혁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역사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현재의 다산동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말년을 보낸다.

 임진왜란에서 대명외교로 원병을 이끌어 내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던 이항복을 만나 본다. <편집자 주>

이항복이 무임강으로 명명했던 ‘왕숙천 하류’는 오늘날 공원화가 이루어져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
이항복이 무임강으로 명명했던 ‘왕숙천 하류’는 오늘날 공원화가 이루어져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

 # 동강에 매료돼 독음(禿音)에 터를 잡다

1613년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며 축출된 계축옥사에 연루돼 공격을 받은 이항복은 관직을 버리고 현재의 남양주시 불암산 아래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지냈다. 이후 정적들의 공격이 심해지자 병든 몸을 이끌고 한강에서 5리쯤 떨어진 독음촌(禿音村, 현재 남양주시 다산동 일대)에 다시 옮겨와 집을 짓고 살며 동강정사라 했다.

이곳을 찾은 조익은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로 동구릉에 있음) 마을 근처라고 했고, 이항복은 ‘무임강(無任江, 왕숙천 하류를 일컬음)’ 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했으니 동구릉과 가까이에 있는 황금산 자락 아래로 추정된다.

동강정사는 ‘ㄴ’자 모양으로 꺾어진 5칸의 사랑채, 세 칸 규모의 정자, 7칸의 안채로 구성돼 있었다. 기둥 두 개에 ‘정관재(靜觀齋)’란 편액을, 대청마루에 ‘동강정사’라는 편액을 걸었다. 세 칸의 별도 정자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란 의미로 청아재(菁莪齋)란 이름을 붙였다.(이세필, ‘동강정사를 그린 그림 앞에 쓰다’ 참조)

그는 동강정사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맑은 강물과 푸른 들이 어우러져 있어 세상의 숨겨진 명승이라 여겼다.

이항복 영정.
이항복 영정.

# ‘농사 짓는 양반’으로 노동을 중시한 이항복

독음은 지형적으로 보면 땅이 낮고 습한 곳이었다. 이항복은 쪽풀 심기에 알맞고 여기서 염료를 채취해 생계를 꾸리기로 계획했다. 가까운 지인이 깜짝 놀라 "양반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제 높은 지위에서 받던 봉록을 받을 수 없으니 농사를 짓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나?"라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최유해에게 보내다’ 참조).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을 지냈음에도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직접 노동을 중시한 그의 철학을 느껴 볼 수 있다.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 1618년 삭탈관직 당하고, 곧바로 동강정사에서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버린 임금이라고 해서 속이거나 구차하게 살기 위해 바른 소리를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북풍이 멀리 가는 사람 옷에 거세게 불어오네. 요동의 성곽은 예전 그대로인데, 그저 정영위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구나"(신익성, ‘동강 상공을 애도하며’ 중에서)라며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견하는 말을 남겨 주위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 지조 있는 충신의 심지를 세우다

유배를 떠난 12월 한겨울, 동강정사를 출발해 망우령을 지나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와 말이 정진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추위였다. 철심(鐵心) 같은 심지를 지닌 이항복이지만 선조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선조의 목릉이 동구릉에 있음)을 돌아보며 고개를 떨궜다.

이항복부터 아래로 6대에 걸친 인물의 편지를 모아놓은 ‘월성육세유묵(月成六世遺墨)’.
이항복부터 아래로 6대에 걸친 인물의 편지를 모아놓은 ‘월성육세유묵(月成六世遺墨)’.

"마음이 든든하니 변방의 길도 어렵지 않은데, 오직 천리 밖에서 임금 사모하는 꿈이 있네(心健關河路不難, 唯有憶君千里夢)"(이항복의 유배 시 중에서)

결국 그는 동강정사를 떠난 지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임진왜란부터 7년 전쟁을 겪는 동안 5번이나 병조판서를 지내며 전장의 중심에서 백척간두에서 서 있던 나라를 구했고, 전후에는 상흔을 딛고 국난을 수습하고 중흥시킨 인물의 죽음이었다.

"공(이항복)은 나라를 유지케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국가의 주석(柱石)이었다"(장유, ‘이항복행장’ 중에서)

이항복이 죽자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먼 지방에서 손수 제수와 제문을 바치는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일세의 영웅인 이항복의 인품과 업적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 공도(公道)와 공심(公心)으로 늘 반성하다

광해군의 서슬 퍼런 정국 하에서 많은 인사들이 이항복을 따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항복은 쉽게 주저앉고 아첨하고 아부하며 비굴하게 야합해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치욕잠(恥辱箴) 참조) 

또한 지난날과 앞날의 걱정을 한순간도 잊으면 폐망한다는 생각으로 늘 올바른 관점을 함양하기 위해 고민했다.(양야잠(養夜箴) 참조)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각자의 행동과 선택에 달렸으니 성심(誠心)으로 사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아침마다 경계했다.(계조잠(誡朝箴) 참조)

특히 저녁마다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나태함을 경계하며 독서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경석잠(警夕箴) 참조). 

공자의 춘추 정신을 규명하고자 이항복이 저술한 ‘노사영언’.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공자의 춘추 정신을 규명하고자 이항복이 저술한 ‘노사영언’.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처럼 이항복은 최고 권력층에 있으면서도 고위층이 성심을 열고 공도를 펼쳐야 하며, 공도는 ‘성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항복의 성심은 ‘새벽부터 일어나 선행을 하는 사람’의 ‘공심(公心, 공평한 마음)’이었다. 이항복은 이런 사람들이 백성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판단했다.(광해군일기 권15 기사 참조).

정치,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변화를 감당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