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기자의 개인적인 평가와는 달리 조직 내에서 늘 주변인이다. 자발적 비주류라면이야 A의 선택이니 굳이 얘기를 꺼낼 이유도 없겠으나 그렇지가 않다. A는 중심까지 진입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가장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번번이 타의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나곤 한다. 당연히 A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A는 이제 뭔가를 해볼 최소한의 동력마저 상실한 듯이 보인다.

 물론 A에 대한 저평가의 원인은 자신에게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 새겨진 ‘주홍글씨’를 지우기에는 너무나 버겁다. 평가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지 A에 대한 ‘인상비평’은 늘 바닥이다. 인상비평은 업무능력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지만 ‘좋은 사람’은 업무능력도 뛰어나다고 여기고, ‘나쁜 사람’은 업무능력도 떨어진다고 지레 재단한다.

 정세균 총리는 "공무원이 일하다 깬 접시는 용서할 수 있어도, 먼지 낀 접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는데, A의 주변인들에게는 그가 깬 접시만 보이는 모양이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면 그 프레임이 깨지기보다는 외려 활성화한다고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프레임은 자주 활성화할수록 고착화한다. 한번 ‘찍힌’ 사람이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그 프레임을 부정한 탓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형편없는 놈’이라는 프레임을 씌웠을 때 "난 형편없는 놈이 아니야"라고 부정해서는 그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부정하면 할수록 ‘형편없는 놈’이라는 문자만 활성화해서 영원히 ‘형편없는 놈’으로 남는다. 실제로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개××는 영원한 개××’라는 표현도 그런 뜻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원치 않는 프레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의 언어와 상대의 문법으로 상대의 의견을 반박해서는 백전백패다.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언어가 활성화하는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의 언어, 나의 문법으로, 나의 신념을 당당히 밝혀야 상대의 프레임은 비활성화하고 나의 프레임은 활성화한다. 혹시 탈출하고픈 어떤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거린다면 당신의 언어와 당신의 문법으로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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