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지금 우리는 ‘비상식’이라는 만연된 풍조에 눈감고 있다.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좀 더 이타적이고 더욱 정의로워지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아직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일까?

2년여 전 대한민국 체육계는 국가대표 코치나 선수 폭행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매 맞은 선수는 쇼트트랙 스타 심석희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후광도 있었겠으나 대통령이 방문하는 자리에 불참할 정도의 대형사고(?)인데다 그 폭행 내용이 실로 끔찍했던 탓에 대한체육회는 부랴부랴 폭행 코치의 영구 제명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심석희를 향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척결’해야 할 권력은 너무 많다. 어쩌면 나 자신을 포함해 기성세대 전체가 대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상층부를 이루는 대다수 남성들에 대한 도전과 단죄는 진행형이고 이제 몰아치는 칼날의 바람은 공정성으로 번졌다. 권석천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힘 있는 자에게 비굴한 얼굴이 되기 일쑤다. 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욕망의 관성에 따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한다. 소심할 뿐인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의 고(故) 최숙현 씨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우리다. 가해자 중 하나인 팀닥터는 의료 행위와 관련한 어떤 자격도 없는 인물이었고, ‘가해 선수’로 지목되고 있는 팀 선배는 국내 랭킹 1위에 올림픽 출전 경력에다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로 유명 체육인이다. 이들이 감독과 함께 폭언·폭행을 상습적으로 했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심각한 문제는 최숙현 씨가 오래전 경찰에 신고하고도 도움 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데다 지난 2월에는 감독과 팀닥터, 선배들을 고소했고, 경북체육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4월에는 대한체육회 인권상담센터에 신고하고, 6월에는 대한철인3종경기협회에 진정서를 냈다는 사실이다. 한 달이 멀다고 온갖 구조 요청을 했으나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받는 심석희조차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외치는 데 매우 오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야말로 인생을 걸다시피 한 용기로 폭력 코치를 고발할 수 있었다. 

최숙현 씨는 비인기 종목 선수이고 이 종목에서 한국이 불모지이다 보니 모르는 국민이 훨씬 많다. 오죽했으면 극단적인 최후의 선택을 했을까 생각할수록 우리 사회의 비상식과 불공정과 불의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스포츠혁신위원회에 참여한 모 교수는 "체육회 내의 스포츠인권센터 자체가 폭력 등에 대한 인지 감수성 부족"이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특권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갑질을 능사로 하는 이들이 나오고 이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절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 태도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그들이 목숨을 버려도 사회적인 분노는 잠시 뿐인 걸 어쩌랴.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비판하지만 법률로 정해 절규하는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정치만 그런가. 아니다. 도처에서 잠시 터져 나온 분노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저 각자도생의 무간지옥을 헤맬 뿐이다. 체육회의 한심한 작태가 이를 대변한다. 최숙현 씨의 발인 직후 한국 체육계 고위인사들은 한데 모여 골프를 치고 있었다는 보도다. 골프장 행사의 뜻은 스포츠 꿈나무를 후원하기 위한 장학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최 씨는 죽기 직전 어머니에게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를 거친 선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가 분명한 데도 골프장에서 행사를 가진 체육회 고위인사들에게 들려줄 말은 단 하나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그 정신이 사라진 체육 현장에 남은 것은 결국 당신들 같은 강자(强者)의 시혜에 기대어 사는 꿈나무를 기르는 일이야말로 공허한 미래라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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